정치학자 김만권은 외로움이 민주주의의 위기와 연관된다고 논한 바 있다. ‘자기책임’과 ‘각자도생’만이 지배하는 황량하고 외로운 세상에서, 약자·소수자를 무임승차자로 지목하는 차별과 혐오가 횡행하고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가 확산된다는 것이다. 외로움의 정치적 효과에 대한 옳은 진단이라 보이지만, 외로움의 효과는 개인의 삶에나 공동체 자체에게 전방위적이고 파괴적인 것일 테다. 외로움이 각종 내과 질환을 유발한다는 연구결과나 부동의 세계 1위인 자살률을 또 거론할 필요가 있을까.
OECD 통계에서 한국은 우울증·우울감 유병률도 36.8%로 1위다. 실제로 한번 주변을 잘 살펴보시라. 위기상황에 있는 노·중년은 두고라도 자해, 우울, 조울, 공황장애, 조현병 등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는 청소년과 20~30대가 얼마나 많은지. 개인들에게 닥치는 외로움, 우울, 불안 같은 정동과 자살, 1인 가구화, 고독사의 사회적 정황은 긴히 연관된 일들일 것이다. 이런 집단적 외로움과 마음의 병 배후에 ‘선진국’ K교육·노동 체제와 신자유주의가 떡 버티고 있다.
사람을 외로움으로부터 지켜주고 자살생각 같은 파괴적 인지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힘은 가족, 연인, 친구와 공동체에서 나온다. 자랑이라는 K정(情) 문화와 공동체주의(?)는 어떻게 됐을까? 오래된 그것들은 더욱 거대해진 재벌 중심 ‘글로벌’ 경제체제와 이제 거의 독도 앞 바다처럼 깊은 불평등 앞에서 초라한 형해나 허구로서만 존재하는 듯하다.
정상가족과 친밀성의 근대적 습속의 헤게모니는 쇠퇴했지만, 새로운 버전의 개인주의나 페미니즘 같은 가치와 규범은 제도로서 아직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예컨대 ‘출산 파업’ 같은 현상은 여전히 고답적이고 반동적인 기존의 가부장제와 젠더구조를 여성들이 집단 보이콧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전래의 틀 안에서의 이성애와 출산·육아의 규범으로써 여성들을 절대 설득할 수 없다는 의미다. 벌써 약 한 세대 전부터 여성들은 아버지의 집을 떠나 새로운 가족과 동반의 규범을 요청하였으나, 이에 대한 적실한 응답은 아직 없다. 중년·노년 남자들은 그들대로 무능하고 외로울 뿐이고, 2030세대 남자들이 ‘설거지론’ 같은 걸로 답(?)하고 있다. 이는 섹스, 결혼, 가족구성을 교환과 비용의 관점에서 남성 중심으로 새로(?) 해석한 것인데, ‘절대 손해 보지 않겠다’는 타산이 기본이다. 물론 그 안에도 의지와 친밀성에 대한 욕구는 들어 있다. 그러나 양성 사이의 이해충돌과 그 제도적·문화적 조정 불가능성 아래 수없이 많은 개인들은 외로운 삶을 꾸역꾸역 이어간다.
외로움 또한 계급적이다. 중산층 이상의 계급은 큰 비용을 들여 결혼, 정상가족, 친밀성을 구매하려 한다. ‘내 새끼 사랑’에도 돈이 엄청 많이 든다. 이 고비용은 그들의 계급투쟁과 허세의 근거라 쉽게 포기되지 못한다. 가족을 이루고 잘 유지하는 일이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경제적으로 정말 어려운 일이 되고 있고, 이제 개개인은 사랑·우정·친밀함을 위해 이전과 다른 방식의 노력을 해야 한다.
그래서 제도와 정부의 힘을 통해 할 일이 많다. 일본과 영국이 외로움부(Minister for Loneliness) 같은 정부기구를 설치하고 부처들이 협력해 외로움과 코로나블루에 대처하는 정책을 내놓았다는 일은 잘 알려져 있다. 이런 일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근본적으로야 학교·가족·직장 즉 교육과 노동체제를 바꾸고 사랑, 섹스, 가족을 에워싼 낡은 껍데기를 해체·재구성해야 한다.
기만적이고 표피적인 ‘공정’과 ‘상식’이나 경쟁지상·물질주의가 아닌 삶의 원리가 퍼져야겠다. 그러나 아주 먼 길이니 가능한 하나하나를 해가면 된다. 이미 국회에 계류된 ‘차별금지법’과 ‘생활동반자보호법’이 그런 것들이다. 이 법들은 개인들의 자유와 평등에 관한 새로운 언어와 규범을 담고 있다. 지난 세월의 변화가 반영되어 있다. 대체 누가 반대하거나 미적거리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