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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영하는 여행에서 맛보게 되는 최초의 달콤한 경험은 바로 호텔 문을 열고 들어설 때라고 말했다. 낯선 이들이 환영해주는 경험은 ‘삶의 생생한 안정감’을 제공한다. <여행의 이유>에서 그는 “나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로부터 거부당하지 않고 안전함을 느끼는 순간을 그리워하는데, 그 경험은 호텔이라는 장소로 표상되어 있다”고 말한다. 

한편 도리스 레싱의 단편소설 ‘19호실로 가다’의 주인공 수전에게 호텔은 온전히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곳이다. 남부러울 것 없는 가정을 꾸리지만 수전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렸다고 느낀다. 그에게 집이란 어머니로서, 아내로서의 역할이 쉼 없이 요구되는 돌봄의 공간일 뿐이다. 수전은 오로지 홀로 되기 위해 런던의 후미진 호텔을 찾는다. 

지난 주말, 내게 호텔은 생의 안정감을 확인하게 해주는 곳도,  자기 자신을 찾을 수 있는 장소도 아니었다. 물론 낯선 이들에게 환영받았다. 하지만 그것은 조건이 정해진 환영, 반쪽짜리 환영이었다. 그곳은 차라리 은밀하면서도 노골적인 차별과 배제의 장소였다. 

높은 층수, 뛰어난 전망을 자랑한다는 서울 도심의 한 호텔에 묵기로 한 것은 딸아이 생일을 맞아 놀이공원에 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놀이공원 근처에 위치한 호텔이어서 정한 곳이었다. 하지만 체크인을 하는 순간부터 기대는 비틀어지기 시작했다. 환한 미소의 직원은 전망 좋은 라운지를 투숙객이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고 했지만 단서를 붙였다. “단, 만 12세 미만 아동은 출입 금지입니다.” 물론 홈페이지의 화려한 소개글에 그런 문구는 없었다. 순식간에 우리는 그곳에 있기 부적절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모든 투숙객”에 우리는 포함될 수 없었다. 대신 근처 아쿠아리움 이용권을 지급했지만, 어쩐지 “이거 줄 테니 나가주세요”란 뜻으로 들렸다. 

‘부적절한 사람’이 된 경험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아이와 함께 호텔 수영장을 찾았다. 그곳에선 거의 추방당할 위기에 놓였다. 수영장 옆 사우나에 아이는 들어갈 수 없다는 거였다. 대신 작은 샤워실에서 간단한 샤워는 가능하다고 했다. 비좁은 샤워실에서 불편하게 아이를 챙기고 짐정리를 하고 있자니 더부살이하는 군식구가 된 느낌이었다. 

인류학자 김현경식으로 말하자면 그곳에서 나와 아이는 순간 ‘그림자’가 사라져버린 사람이 됐다. <사람, 장소, 환대>에는 소설 <그림자를 판 사나이>에 나오는 그림자를 잃어버린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그림자가 없다는 이유로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못한다. 김현경은 ‘사람’이 되기 위한 조건으로 환대와 장소를 꼽는다. 환대는 자리를 주는 행위라는 것이다. 그는 묻는다. “조건부의 환대 역시 환대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주어진 환대가 언제라도 철회될 수 있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환대되지 않은 게 아닐까?”

그날 호텔은 나에게 생의 안정감이 아니라 불안정감을 확인하는 장소였다. 우리 사회에서 아이란 ‘미성숙한 인간’으로서 특정 장소에서 배제되고 추방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사실 말이다. 또 ‘나의 진정한 사회적 위치’를 맨몸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아이를 동반한 부모’로서 나 역시 배제·추방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 말이다. 그곳에서 나와 아이는 조건부 환대를 받는 ‘이등 시민’이었다. 

아직 어린 아이에게 이번 경험이 어떤 기억으로 남아 의식과 무의식에 자국을 남길지 두렵다. 헌법재판소에서 낙태죄 합헌 의견을 낸 두 명의 재판관은 “우리 모두 태아였다”고 말했다. 여성의 자기결정권뿐 아니라 출산과 양육에 대한 사회경제적 조건, 국가의 책임에 대한 고민 없는 말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 말을 바꿔 말해보자. “우리는 모두 아이였다.” 아이를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취급하고 배제하는 사회, 이 사회가 과연 아이가 태어나 온전한 권리를 누리며 살 수 있는 사회인가.

<이영경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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