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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팝나무에 꽃이 한창입니다. 하얗고 가늘게 뻗은 꽃잎은 하얀 쌀밥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래서 이름이 이팝인가 하는 생각도 합니다. 이름이 참 정겹습니다. 꽃 향기가 바람을 타고 날아와 코를 간지럽힙니다. 이팝나무는 우리 토종 수종으로 알려집니다. 봄날에 남쪽부터 꽃을 피워 5월에 서울에 한창입니다. 

우리 곁에 소중한 것들이 참 많습니다. 이팝나무처럼. 사계절이 뚜렷하고, 지구 북반구 중간에 위치한 데다, 바다로 둘러싸이고, 산이 많은 이 땅은 소중한 생명으로 가득 찬 곳입니다. 남의 것으로 알고 지내지만 사실 이 땅이 원산지인 식물들도 꽤 있습니다. 

전 세계에 고급 크리스마스트리로 팔리는 구상나무가 그중 하납니다. 화사한 향기로 익어가는 봄을 알리는 꽃 라일락도 그렇습니다. 라일락의 원종은 수수꽃다리로 알려집니다. 구상나무는 한라산, 지리산과 덕유산 높은 지역에서 군락을 이루며 잘 지내고 있습니다. 수수꽃다리도 라일락과 함께 짙은 봄 향기를 뿌리며 여전히 어느 낯익은 골목에서 우리와 함께 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19세기 말에 프랑스 신부가 제주도에서 구상나무를 연구해 해외에 알렸다고 합니다. 1940년대 후반 미국 식물채집가가 북한산, 도봉산에서 수수꽃다리를 채집해서 미국에 돌아가 품종을 개량해 ‘미스 김 라일락’이라는 이름을 붙여 팔았다고 합니다. 수수꽃다리 자료 정리를 도운 분 이름을 땄다고 합니다. IMF 외환위기 때 외국 종자 기업들이 우리 종묘회사를 인수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데에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5월, 거리를 거닐다 밤하늘을 하얗게 수놓은 이팝나무 꽃잎을 보면서, 올봄 출근길에 봤던 꽃과 나무를 떠올려 봤습니다. 산수유, 영춘화, 개나리, 진달래, 애기똥풀, 능수벚꽃, 수수꽃다리, 귀롱나무, 봄맞이꽃, 봄까치꽃, 철쭉, 흰제비꽃, 꽃마리, 현호색, 조팝나무, 이팝나무. 몇 걸음만 떼도 아름다운 우리말 이름을 가진 나무와 꽃들을 금방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서울에 곧 찔레꽃 향기가 퍼지겠네요.

나라마다, 지역마다 품종을 법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인식이 퍼진 것이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습니다. 지식재산권 보호의 일환으로 종자를 등록하고 보호하자는 인식이 퍼진 때는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 출범을 전후한 때였습니다. 우리 역시 그런 세계화에 발맞춰 1995년 종자산업법을 제정했습니다. 품종 보호에 대한 수요가 늘면서 2012년에 식물신품종 보호법을 제정했습니다. 나무, 꽃과 함께 콩과 같은 곡물 씨앗도 우리 토종 종자가 참 다양하고 많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는 토종 종자와 함께 세계 각국의 종자를 모아서 보관하는 국립종자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참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눈에 띄지 않아도 다양한 분야에서 품종을 발견, 개발하고 보호하려고 노력하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이런 노력이 돈을 벌기 위해서, 우리만을 위해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류를 위해 꼭 필요한 작업이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앞으로 우리 품종, 원종과 그에 대한 지식재산권 보호에 많은 관심을 가져주길 바랍니다. 

자기 것을 잘 지키지 못하는 사람, 그런 나라를 보면 자기비하가 심합니다. 자기 것을 부정하며 다른 사람, 다른 나라에 기댈 생각부터 합니다. 자기 것을 잘 지키는 사람, 그런 나라는 곁에 있는 것들을 소중히 여깁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을 존중하고 곁에 있는 것들을 아끼며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적어도 청년세대는 자기 것, 곁에 있는 것들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대다수라고 감히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어릴 적 가로수 하면 흔히 떠올리던 나무들이 있습니다. 이팝나무는 그런 나무 대열에 올라있지 못했습니다. 그 흔한 가로수에 남의 것이 더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 시절 5월에, 이 땅 곳곳에서 이팝나무를 볼 수 있어 행복합니다. “아름다운 것은 쓸모 있는 것만큼이나 유익하지요.” 소설 <레미제라블>에서 미리엘 주교가 한 말을 떠올립니다.

<함석천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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