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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세상읽기

침팬지 공화국

opinionX 2019. 5. 17. 10:18

사고로 우주를 떠돌던 한 우주인이 침팬지 혹성에 불시착했다. 우주선을 간신히 빠져나와 헤매고 다니는데 이를 수상히 여긴 침팬지 공안에게 붙잡혔다. 이 혹성에서는 지위가 높을수록 허리를 곧추세우고 걷는데 침팬지를 닮지 않은 이상한 자가 ‘곧선 보행’을 하고 다니니 난리가 난 것이다. 침팬지 공안마저 허리를 구부정하게 하고 다니는 판에 ‘듣보잡’이 감히 허리를 펴고 다니다니.

과학수사대로 바로 압송돼 인지능력 테스트를 받았다. 컴퓨터 화면상에 0부터 5까지 숫자와 그 위치를 보여줬다. 잠시 후 그 숫자들을 모두 가리고 숫자 순서대로 위치를 짚어내라 했다. 우주인은 순간 기억능력을 활용해 정확히 숫자의 위치를 짚어냈다. 이제 0부터 7까지 숫자를 보여준 후 다시 테스트했다. 이번엔 잘 짚어내지 못했다. 그러자 숫자를 9까지 높였다. 몇 개를 맞히다가, 도저히 계속할 수가 없었다. 침팬지들은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허리를 펴고 다니는 게 말이 되느냐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침팬지 혹성의 법전 몇 권을 주고 다 외우라 했다. 일주일 후 4지선다형 시험을 보았다. 단순 암기하지 않으면 시간 내에 풀 수 없는 퀴즈풀이였다. 기억을 최대한 되살려 시험을 보았다. 예상보다 시험 성적이 잘 나왔다며 침팬지들이 감탄했다. 또 다른 시험지를 가져왔는데, 이번엔 5지선다형이었다. 고향별에서는 이미 이런 시험은 인공지능이 다 대체해 쓸모없게 된 지 오래라 오히려 어려웠다. 논술시험도 보았다. 말이 논술시험이지 법전을 통째로 암기하지 않으면 한 문장도 제대로 쓸 수 없는 문제였다. 결국 변방으로 쫓겨났다. 수도에 살 수 있는 인지능력이 부족하다고 판정받았기 때문이다. 땅만 보고 걸으라고 척추압박 장치로 허리를 구부러트려 놓았다. 구부정한 허리를 끌고 변방으로 가보니 모두들 땅을 내려다보고 기어 다녔다. 알고 보니 이곳에선 세습제를 없애고 민주주의를 한답시고 시험을 통해 지배층과 피지배층을 나눈다. 태어나자마자 모두 단기 기억능력 키우는 교육을 받는다. 일정 교육기간이 지난 후 시험 성적에 따라 허리 각도가 정해진다. 

근데 단기 기억능력 시험에 관한 한 침팬지를 당해낼 재간이 없다. 사진 찍듯이 정확히 사물들의 배치상태를 기억하는 침팬지들은 온갖 시험을 휩쓴다. 그중에서도 법조인이 되는 시험이 압권이다. 이 시험에 붙으면 이들을 한데 모아 교육을 시킨다. 침팬지들 사이에 온갖 끈끈한 동료애가 생긴다. 이후 법조계로 나가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다 결국 정계로 진출한다. 형식상으로는 주권을 지닌 인민이 민회를 구성하여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 하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원로원에 맡겨져 있는데 대개 법조계 침팬지 출신이다. 인민이 직접 뽑은 집정관조차 침팬지 원로원에게는 고개를 조아린다. 침팬지 원로원은 정치를 천적 박멸과 먹고사는 문제로 쪼그라트린다. 입만 열면 천적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겠다고 핏대를 올리거나 경제 살리겠다며 게거품을 문다. 놀랍게도 이런 조악한 선동이 인민에게 잘도 먹힌다. 대다수 인민은 주로 변방에 흩어져 사는데 침팬지로부터 개, 돼지 취급을 받는다. 그런데도 시험 못 봐 네발로 기어 다니게 됐다며 스스로를 탓한다. 개는 침팬지 주인을 쫓아 사냥을 다니느라 혼이 나가있다. 보이는 건 모두 주인의 천적으로 간주하고 물어뜯는다. 돼지는 먹이를 찾아 이리저리 땅 헤집고 다니느라 부산하다. 그래도 과거 궁핍한 삶에 비해 얼마나 풍요로우냐며 앞으로 경제가 더 성장하면 민생 문제가 말끔히 해결될 거라는 침팬지의 부추김에 쉽게 들썩댄다.

침팬지 공화국에서는 서로를 ‘충(蟲)’이라 비하한다. 무엇보다 침팬지 정치가 혐오와 증오의 언어로 인민의 가슴에 적개심을 심어놓았기 때문이다. 이를 보다 못한 우주인이 눈을 들어 하늘을 한번 보라고 일렀다. 누구 죽는 꼴 보고 싶으냐며 화들짝 놀란다. 하늘을 우러러 보는 자를 극형에 처하는 공화국보안법을 모르냐는 것이다. 그럼 평생 허리 한번 못 펴고 땅바닥을 기며 살아갈 것인가? 되묻자, 이번 생은 어차피 ‘폭망’했으니 자식 교육시켜 침팬지로 성공시키는 수밖에 없다는 자못 결연한 답이 돌아올 뿐이다.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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