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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초 이 칼럼(2018·3·27)에서 속전속결로 진행되던 ‘(4·27 판문점) 남북정상회담’과 ‘(6·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이 성사될 것으로 보았던 동인(動因)으로 첫째, 문재인 정부의 선제적이고 치밀한 준비, 둘째, 북한의 핵무기와 대륙간탄도미사일의 시험발사, 마지막으로 오랜 제재로 인한 북한 내구성의 약화를 들었다. 그러면서 대화로 포장된 길이 낭떠러지로 이어질 수 있음을 사족으로 달았다. 이후 계절이 네 번이나 바뀐 지금 사족이 점점 불길한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돌이켜보면 판문점회담과 평양회담(9·18~20)에서 남북이 공동 승리자였다면 북·미 정상들이 최초로 마주한 싱가포르회담은 북한의 완승으로 끝났다. 당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회담 후 가진 단독 기자회견에서 쏟아낸 발언에서 북·미 양국은 금방이라도 행동 대 행동으로 나아갈 듯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싱가포르회담 합의문을 두고서 미국 국가안보 엘리트들의 역풍은 예상보다 훨씬 거칠고 집요했다. 뉴욕타임스(2018·6·12)는 “트럼프 대통령이 북·미 정상회담에서 김정은 위원장보다 한 수 아래”였으며 “농축 우라늄 비축량을 98% 줄이도록 규정한 이란 핵합의보다도 훨씬 못하다”고 비판했다. 

그래서였을까, 싱가포르회담 후 8개월여 만에 개최된 베트남 하노이회담(2·27~28)의 결과는 절치부심(切齒腐心)한 트럼프의 한판승이었다. 존 볼턴, 마이클 코언, 비등가성, 미국 의회 반발 등 여러 변수가 복합적으로 얽혀 나타난 결과였어도 이를 미처 예상치 못한 북측으로서는 충격이 컸다. 이후 김 위원장은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4·12)에서 “연말까지 미국의 변화를 기다리겠다”며 협상 여지를 두면서도, 한 외세(미국)를 견제하기 위해 또 다른 외세(러시아)를 끌어들이는 ‘균세외교(均勢外交)’를 펼쳤다. 말이 좋아 균세외교이자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일 뿐 김 위원장으로서는 절박하게 도움을 청해야 하는 딱한 처지가 됐다. ‘자력갱생(自力更生)’이니 ‘우리민족끼리’를 무색하게 만든 나들이였다.

연내까지 미국의 행동변화를 겁박(劫迫)한 북한에 트럼프 행정부가 순순히 응할 가능성은 영(零)에 가깝다. 볼턴 국가안보보좌관을 필두로 트럼프 행정부 내 매파들(hawks)은 드디어 대북 제재 효과가 나타나는 것으로 확신하기 때문이다. 워싱턴 강경파들이 보기엔 초조한 측은 미국이 아니라 북한이다. 특히 이들은 하노이회담 이후 드러난 북한의 ‘거친 대응’에서 김정은 정권이 제재로 인해 고통을 심하게 느끼는 것으로 ‘인식’했다. 

같은 맥락에서 김정은의 블라디보스토크 열차 여정(旅程) 역시 직면한 위기를 우회하려는 관성적 행동이었다. 하지만 8년 만에 개최된 북·러 정상회담치곤 너무 초라했다. 공동성명 채택은커녕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회담 후 “비핵화와 관련해서 미국과 입장이 동일하다”고 했다. 김 위원장으로서는 허가 찔린 셈이다. 북한 비핵화를 두고서 강대국들이 고공(高空)에서 주고받는 게임의 규칙을 알 리가 없는 세습 왕조국가 북한의 ‘조정대신(朝廷大臣)’들 중 어느 누가 ‘찬배(竄配)’에도 개의치 않고 ‘미 제국주의’와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 일조했다는 평가를 듣고 싶어할까. 21세기에 미국을 상대로 척화비(斥和碑)를 세우려는 최선희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의 거듭되는 대미 강경 발언도 이런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 

잠자고 있는 사람보다 잠자는 척하는 사람을 깨우기가 더 힘들다면 비핵화 시늉을 내는 국가를 완전하게 비핵화시키는 게 생각보다 오래 걸리고 힘든 과정으로 여기는 것이 합리적 판단이다. 여기에다 중국과 러시아는 북한의 자강(自强)을 도모하는 척하면서 북한을 각자 자신들의 영향권 내에 묶어두려 한다. 강대국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 북한 비핵화호의 표류, 나아가 침몰까지 예상할 수 있다. 더 늦지 않게 문 대통령이 김 위원장으로 하여금 핵무기가 국제정치에서 더 이상 ‘로열 플러시’(royal flush)가 아니며, 더군다나 ‘벼랑 끝 전술’이 트럼프에게는 통하지 않을 것임을 깨닫게 해야 한다.

<이병철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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