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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러운 사고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일도 없을 것이다. 잠시 혼절해서라도 자신에게 닥친 비극을 잊으려고 할 정도로 고통은 참혹하기만 하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따뜻한 위로가 쇄도할 것이다. “그는 좋은 곳으로 갔을 거예요” “인생이란 어차피 이별 아닌가요. 이별이 조금 일찍 왔을 뿐이에요” 등등. 그렇지만 고통이 완화되기는커녕 그들의 위로가 위선적으로 들리기까지 한다. 그러니 겉으로 고맙다는 말은 하지만 속으로는 “당신처럼 행복한 사람이 나의 고통을 헤아릴 수나 있을 것 같나요”라고 절규하기 십상이다. 이럴 때 자신보다 더 큰 상처와 고통을 가진 친지가 찾아오면 상황은 전혀 달라진다. 그는 다른 사람과는 달리 그저 묵묵히 눈물을 비치며 우리의 손을 꼭 잡을 뿐이다. 이런 고통에 무슨 말로 위로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저 손을 잡아주거나 묵묵히 옆에 함께 있어주는 것밖에.


바로 여기에서 인간의 놀라운 진실이 발견된다. 더 큰 고통을 경험했던 사람만이 그보다 적은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 작으나마 위로가 될 수 있다는 진실 말이다. 자신보다 앞서 모든 희로애락(喜怒哀樂)의 감정을 겪은 친구의 속삭임처럼 우리 곁에 있는 것이 바로 음악이다. 그래서 음악은 삶이 피폐했을 때 우리에게 더 없이 소중한 벗이 되어왔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음악을 만드는 예술가들을 사랑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자신의 개인적인 상처나 환희에 보편적 의미를 부여하여 그것을 매혹적인 선율로 우리에게 들려주기 때문이다. 천둥벌거숭이 친구들보다는 때때로 음악이 백배나 더 힘이 되는 경우도 있다. 그랬었다. 유재하와 김광석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우리 대중음악은 말 그대로 대중의 친근한 친구였던 적이 있었다.


모든 예술가들처럼 한때 우리 음유시인들에게도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었다. 당연한 일이 아닌가. 자신의 진솔한 감정을 토대로 노랫말과 선율을 만들면, 스타일이 발생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그래서였을까. 1990년대까지 매해 압도적인 인기가수나 인기곡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대중은 자기만의 음유시인을 가질 수 있고, 그에 따라 궁핍하나마 우리 음유시인들은 생계를 유지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의 열풍이 거세지면서 사정은 완전히 달라진다. 이제 음악도 산업이 되어버린 것이다. 음악이 수단으로 전락하고 돈이 목적으로 등극한 것이다. 물론 과거 우리 음유시인들도 돈을 벌었다. 그렇지만 그들에게 돈보다 소중했던 것은 자신만의 스타일로 자기의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것이었다. 당연히 그들에게 돈은 자신의 노래를 얼마나 대중이 사랑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였을 뿐이다.


2000년대 들어 모든 것이 달라진 것이다. 이제 가수들은 자기만의 스타일이 아니라 대중의 취향이나 욕망에 영합하려고 한다. 그래서 이제 노래는 수단이고 돈은 지상의 목적이 되어버린 것이다. 물론 이런 음악 산업화의 중심부에는 재계의 재벌 흉내를 내는 거대한 기획사가 똬리를 틀고 있다. 이제 가수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스타일을 헌신짝처럼 버려야만 한다. 기획사는 음악소비자들의 욕망을 정확히 읽고 있고, 거기에 맞춘 노래를 가수들에게 공급할 테니까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만의 고유한 스타일은 장애만 될 뿐이다. 너무나 강한 스타일과 개성은 대중음악이 대량 소비되는 데 장애물로 기능할 테니까 말이다. 여기서 스타일과 개성의 실종이란 묘한 현상이 발생한다.



일러스트 _ 김상민

▲ “우리나라를 넘어 세계를 휩쓰는 싸이의 리드미컬한 ‘하체 음악’

그러나 조용필의 낭만적 감성을 대중은 여전히 갈구하고 있었다”


개성 있는 예술가들이 많을수록 대중은 하나의 덩어리가 아니라 나름대로 개성을 가진 존재로 분화할 수 있는 법이다. 이것은 음악 하나를 만들어 대량 소비시키려는 기획사로서는 여간 못마땅한 일이 아닐 것이다. 대량소비를 목적으로 한다면 기획사는 대중을 하나의 덩어리로 만들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인간이라면 누구나 거부할 수 없는 공통적인 욕망을 자극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일 것이다. 여기서 마침내 허리 아래로 부르고 듣는 음악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가장 원초적 욕망, 그것은 바로 섹스다. 아직도 금기시되고 있기에 섹스에 대한 욕망은 뿌리치기 힘든 유혹일 테니까 말이다. 여기서 모든 사람의 정신과 영혼은 나름대로의 역사와 고유성을 가진다는 자명한 사실은 무시될 수밖에 없다.


마침내 허리 위로 부르고 듣는 음악, 그래서 각 개인만의 고유성에 호소하는 음악은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이다. 최근 10여년간 얼마나 많은 아이돌 그룹이 허리 아래를 흔들며 우리의 아랫도리를 자극했는가. 이제 하체와 하체가 교감하는 음악이 주도적인 대중음악이 된 것이다. 하체와 하체 사이에서 공명하는 음악은 세대, 언어, 그리고 역사를 가로지르는 놀라운 힘이 있는 법이다. 그래서 청소년 팬뿐만 아니라 삼촌 팬마저도 생길 수 있었고, 우리나라를 넘어서 미국이나 영국, 호주, 중국, 일본 등등 세계인들의 하체에 강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싸이의 리드미컬한 하체가 상징하는 것이다. 그것이 말춤이든 혹은 시건방춤이든지 간에 말이다.


(경향DB)


“있잖아 말이야/ 너의 머리 허리 다리 종아리 말이야/ Good! feeling feeling? Good!/ 부드럽게 말이야/ 아주 그냥 헉소리나게 악소리 나게 말이야.” 최근 다시 세계적으로 선풍을 일으키고 있는 ‘젠틀맨’에 실려 있는 가사 중 일부분이다. 지금 직면하고 있는 이성의 고유한 개성이나 역사를 읽는다는 것은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다. 그러니 육체에만 주목하라. 그렇다면 남녀관계의 모든 곤란은 사라지고 ‘쿨’한 혹은 ‘굿’한 전망만이 남게 될 테니까. 그렇지만 자신뿐만 아니라 타자도 육체로 모두 환원되지 않는 어떤 고유성이 있다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진실이다. 이런 자각 때문일까. 이제는 전설이 되어버린 60이 넘은 어느 노가수의 노래가 갑자기 주목을 받는 놀라운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단순한 주목 정도가 아니라 실질적인 앨범이나 음원 구매로까지 이어지는 열기다.


“이런 날이 있지 물 흐르듯 살다가/ 행복이 살에 닿은 듯이 선명한 밤/ 내 곁에 있구나 네가 나의 빛이구나/ 멀리도 와주었다 나의 사랑아.” 가수 조용필의 19집 앨범에 실려 있는 ‘걷고 싶다’라는 노래 가사 중 일부분이다. 인생의 동반자가 생겼다는 행복, 나에게 삶의 빛을 비추어준 사랑하는 사람을 기리는 노래다. 탁월한 발라드 가수의 노래답게 서정적인 가사와 선율이 돋보인다. 오래된 연륜에서 나온 세련됨을 가지고 있지만 분명 우리 노가수의 노래에는 소년을 연상시키는 목가적인 낡은 감성, 현실에서는 여지없이 좌절될 수밖에 없는 낭만적 감성이 깔려 있다. 그럼에도 왜 지금 다시 조용필인가? 하체로 부르고 듣는 노래가 지배적인 지금에 대한 대중의 무의식적인 저항이나 거부 반응은 아닐까. 그래서 아이돌로 시작되어 싸이로 정점을 찍고 있는 하체로 부르는 수많은 노래의 범람 속에서, 시대착오적일 수도 있는 조용필의 노래는 새롭다는 기묘한 시차(parallax)를 낳고 있는 것은 아닐지.


(경향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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