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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MB만 넘으면 된다’는 생각이 자본이 바라는 상태 아닐까

재능교육 해고노동자들의 농성투쟁이 1500일을 앞두고 있다. 그들은 이른바 ‘특수고용’ 노동자들로서 사측과 정부에선 ‘노동자가 아니라 개인사업자’라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노동자라는 것조차 인정받지 못하는 열명 남짓의 노동자들이 벌이는 외로운 싸움은 우리의 삶에 어떤 것일까. 그리고 그 선두에 선 사람의 속내는 무엇일까. 학습지노조 재능교육 지부장 유명자씨를 서울시청 앞 농성장에서 만났다.


▲노동자의 현실에선 노무현 정권도 잔혹

김규항 = 1500일이 되어간다.

유명자 학습지노조 재능교육 지부장이 15일 서울 중구 재능교육 을지로 사옥 앞에 설치된 농성장에 섰다. 권호욱 선임기자 biggun@kyunghyang.com

유명자 = 곰도 100일 동안 쑥과 마늘만 먹고 사람이 되었다는데 우리 노동자들은 곰보다 못한 처지인 모양이다. 1500일이 돌이켜보면 참 길지만 하루하루 동지들과 함께할 일을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김규항 = 재능노조가 만들어진 게 1999년이고 한때 노조원이 3000명에 달했다. 이젠 열명 남짓이 싸우고 있고 특수고용 노동자는 노동자라는 것조차 인정받지 못한다.

유명자 = 특고(특수고용 노동자)라는 말이 우리가 99년에 단체협상하고 노조 인정받으면서 생겨났다. 그 이듬해부터 보험 모집인, 건설 레미콘, 덤프, 경기 보조원 이런 데들이 막 조직화되기 시작했다. 정부와 자본 측에선 그 흐름에 긴장했고 노조 방해공작과 법적 차단에 들어갔다.
노동자임을 인정하지 않고 공식적인 이름도 특수고용 노동자가 아니라 ‘특수 형태 근로 종사자’다. ‘너희는 노동자가 아니라 사장들이다. 자신의 노력에 따라 얼마든 잘 살 수 있다’는 선전이 일반 시민들에게도 깊이 심어졌다.

김규항 = 대부분 여성들이라 장기 농성에 어려움이 많았을 텐데.

유명자 = 거리에서 하는 농성이라 여성 건강에 더 치명적이다. 돌아가면서 병에 안 걸린 사람이 없다. 남성 위주 공장 같은 데는 사수대도 있고 용역깡패가 들어와도 맞짱 뜨고 싸우고 한다지만 우린 용역들이 들어왔을 때 훨씬 무력하다. 용역들의 행태도 많이 다르다. 성적 수치심이나 신변의 위협들, ‘너희 집 가봤는데 집 앞에 자전거 좋더라. 네 새끼 거냐’는 식의 협박들. 불면증, 정신적인 쇠약에 정말 몸도 마음도 피폐해진다.

김규항 = 이명박 정권 이후 노동운동 진영 전체가 갖는 흐름이 있고 그런 것에서 속앓이는 없는가.

유명자 = 언제쯤이면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한번 할 수 있을지. 생각이 다른 건 좋은데 비판과 토론이 이루어지지 않는 게 문제다. 이번 서울시장 선거도 민주노총에서 너무 심하게 박원순 일변도로 몰아붙여서 회의 때 한 번 토해낸 적 있다. 분위기 싸해지고. 나는 어느 정파의 이해관계에서 말하려는 게 아니라 노동자로서, 계급의식 속에서 토론하고 판단하자는 건데 그런 논쟁이 어렵다. 이명박만 넘어서면 된다는 생각에 모두 빠져있는 거야말로 자본이 바라는 상태 아닐까.

김규항 = 한국의 자본과 지배계급은 갈수록 철저한 계급의식을 갖고 행동하는데 운동진영은 여전히 윤리로 세상을 보는 경향이 있다. 어떤 계급의 편인가가 아니라 나쁜 사람인가 좋은 사람인가가 주제가 되면 그들을 넘어설 방법이 없다.

유명자 = 안정된 삶을 살아가는 진보적인 경향의 인사들이 ‘이 정도면 훌륭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우리로선 ‘별다를 게 없는 사람’인 경우가 많다. 노동자의 현실에선 이명박 정권보다 노무현 정권이 더 잔혹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충분히 체험한 일인데 다들 너무 쉽게 잊는다.

김규항 = 신자유주의 시대라는 게 노동이나 경제만 양극화되는 게 아니라 사회문화의 모든 부분이 양극화한다. 소설 같은 것도 신경숙 공지영은 뭘 내도 몇십만부 팔리지만 여타의 의미있는 작품들은 아예 독자들의 눈 밖인 경우가 많다. 재능투쟁에 대한 대중적 관심도 그런 면이 있는데.

유명자 = 많은 분들이 왜 재능지부 싸움이 그렇게 이슈화나 쟁점이 안 될까 궁금해 한다. 그렇게 부각되지 않은 조건을 가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학습지 산업 자체가 산업적인 파괴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특수고용 노동자 문제라는 게 입법하고 정부 측이 움직이지 않으면 우리 실력으로는 한계가 있다. 레미콘이나 덤프처럼 조직화된 수만명 조합원이 있는 곳도 많이 싸웠지만 아직 해결이 안 되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겪는 어려움이 전체 특수고용 노동자들의 어려움으로 생각하고 전체 노동자계급의 싸움으로 생각하게 된다.

김규항 = 자신들의 문제 해결에 집중해도 모자랄 판인데 노동자 계급의 문제로 사고한다니 존중심이 든다. 사실 학습지 노동자들의 싸움은 한국의 서민부모들이 공분할 문제다. 재능교육 사주는 타워팰리스에 살지만 이미 부자의 아이들은 학습지로 공부하지 않는다. 학습지라는 것은 돈이 성적을 만드는 한국의 교육현실 속에서 서민들이 선택하는 경쟁 방법이다. 그렇게 서민의 돈을 우려 부자가 된 사람들이 학습지 교사의 노동자성조차 인정하지 않고 있다.

유명자 = 처음에 노동조합을 만들고 파업할 때 그런 점에서 부모들과 공감대가 형성되었었다. 내 아이 가르치는 선생이 이렇게 열악한 상황이구나, 이게 개선이 되어야만 내 아이를 제대로 가르치겠구나 하는 생각들이 있었다. 한달 넘게 파업을 했는데 그렇게 교육열이 높은 엄마들이, 돈 생각 나고 아이들 교재 한 권 안하면 그렇게 아깝고 뭔가 뒤처진다고 조바심내는 엄마들이 90%가 넘게 우리를 기다려줬다.
그 힘을 받아서 2001년도에는 회비 인상 저지 투쟁도 했다. 우린 회비에 따라서 몇 퍼센트를 받기 때문에 회비가 오르면 임금이 오른다. 그러나 IMF 이후 실직하거나 어렵게 된 가정을 생각해서 회비 인상을 반대했던 것이다.

김규항 = 내가 발행인 노릇을 하고 있는 ‘고래가그랬어’의 기본적인 편집 철학이 ‘우리 아이들은 대부분 노동자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미래의 노동자들이 어떤 공부를 하고 어떤 생각을 하면서 자랐으면 하는가.

유명자 = 말씀대로 아이들의 99%는 노동자로 살아가게 된다. 그런데 부모들은 아이가 노동자로 살길 바라지 않으니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가치관이 형성될 여지가 없다.
국어 논술 교재에 ‘아이아코카의 선택’이라고 해서 구조조정 이야기가 나온다. 아이들이 열에 아홉은 그런다. ‘회사 살리려면 당연하지요.’ ‘그러면 아빠가 그렇게 잘리면 어떻게 해?’ 하면 다들 ‘우리 아빠는 그런 일 하는 사람 아니에요’ 말한다. 아이들은 공장에서 기름 묻히고 일하는 사람만 노동자라 생각한다. 부모들의 변화가 중요하다.

김규항 = 고래가그랬어도 결국 부모 문제라는 생각에서 부모서명운동과, 다른 고민을 하는 부모들의 전국적인 커뮤니티를 준비하고 있다. 교육 문제를 보면 사실 보수진보가 없다. 진보교육을 말하고 진보교육감 말하는 사람들도 제 아이는 일찌감치 외국에 보내거나 적어도 외고엔 보낸다.

유명자 = 일제 고사 반대할 때 전교조 조합원들 10퍼센트만 참여해도 일제고사를 없앴을 것 아닌가. 상급 노동운동가 중에도 알게 모르게 기러기아빠들이 있다. 불안감에 내몰리는 서민 부모들 앞에서 너무들 하는구나 싶을 때가 많다. 그런 사람들이 계급적 관점을 가질 수 있을까.

김규항 = 부모들 강연 가면 말하곤 한다. ‘지금 이 자리엔 여럿인 것 같지만 동네로 돌아가면 다들 혼자시죠?’ 그럼 다들 씁쓸하게 웃는다. 교육문제든 노동문제든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건 연대다. 어떤 사람들은 서유럽이나 북유럽의 자본이나 지배자들은 톨레랑스와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넘쳐서 노동자들에게 잘 대해주는 것처럼 하는데 까르푸 자본이 한국 노동자와 프랑스 노동자에게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이는 것에서 보듯 자본이나 지배 계급의 습성은 기본적으로 똑같다. 다른 건 그곳 노동자들은 노동자의 문제에 연대하고 우린 연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본이 하는 것의 반의 반만 연대해도 노동자 투쟁 승산

유명자 = 우리 싸움에 연대해온 대학생들에게 항상 이야기한다. ‘연대해 주러 온다’고 생각하면 오지 마라, 너희가 시간되고 사회의식이 있어서 불쌍한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 싸우는데 와서 힘이 되어준다고 생각하면 오지 마라. 너희들도 노동자로 살아갈 것인데 자본과 어떻게 싸우고 대응하고 어떤 원칙을 갖는 게 바람직하다는 걸 배우길 바란다.
청소노동자들에게 대학생들이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그 호칭엔 연대하고 함께 싸우는 노동자가 아니라 가르치고 도와주어야 할 불쌍한 대상의 의미가 느껴진다.

김규항 = 참 중요한 말이다. 연대와 불우이웃 돕기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함께 되새겼으면 좋겠다. 물론 그런 관점으로 사람들의 선의를 재단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지만 구분되지 않으면 그런 싸움을 지지하는 체하면서 그런 싸움을 낳은 구조를 챙기는 사람들에게 악용될 수밖에 없다. 청년들과 시민들의 의식이 놀라운 속도로 진전하고 있으니 나아질 거라 본다. 김진숙씨가 309일 만에 무사히 내려왔다.

유명자 = 한진 싸움도 희망버스가 뜨기 전까지 굉장히 외롭고 된 상태였지 않은가. 김진숙씨가 처음 올라갔을 때 운동진영에서조차 영웅주의니 해가면서 비판들이 있었고. 희망버스가 이렇게 세상을 들썩이게 할 거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참 큰일을 했다. 그러나 그만큼 희망버스에는 거품도 많았다. 한진 싸움이 일단 권고안으로 마무리되었지만 싸움은 이제 시작이라고도 할 수 있다.

김규항 = 김진숙은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역할 이상을 충분히 했으니 이젠 우리가 할 일이 남은 셈이다.

유명자 = 민주노조를 지키면서 합의안이 이행되도록 싸워나가야 하는데 쉽지만은 않은 싸움이다. 조남호는 쌍용차 이상의 짓을 하고도 남을 사람이고 ‘1년 유예’라는 조건 자체가 그 준비 기간인 셈이다.

김규항 = 진보정당도 아닌 정동영씨가 그만큼 애를 쓴 것, 김여진씨의 인간적 진정성은 그 자체로 상찬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승리의 축제 분위기에서 희망버스 활동가들은 오히려 생각이 많아 보이더라.

유명자 = 무대 뒤에서 묵묵히 일해온 사람들, 김진숙의 해결을 위해 노력하면서 김진숙을 만들어낸 구조를 함께 고민하는 사람들, 김진숙의 생환을 기뻐하면서 승리감에 취하지 않고 본격적인 싸움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길 바란다.

김규항 = 선생 역시 생각이 많아 보인다. 재능 투쟁과 결부지어 좀더 듣고 싶다.

유명자 = 사실 많이 걱정된다. 근래 몇 년 동안 투쟁 사업장 하나하나 합의되고 마무리될 때마다 자본은 거의 업종과 산업을 넘어 똑같은 합의안을 제시하고 있다. 소수 몇 명을 일시에 복직시킨다고 해서 큰 비용이 나가는 것도 아닌데 1년, 2년, 3년씩 유예 기간을 두고 순차적으로 조금씩 들여보내선 현장에서 고립시켜서 빼내고 고립시켜서 빼내고 해서 결국 고사시킨다. 우리는 지금 ‘열두명 전원의 유예없는 일시 복직’을 요구하고 있다. ‘저 꼴통들 힘도 제일 없는 것들이 쪽수도 제일 안 되는 것들이 답답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우리도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일단 그렇게 내걸고 그것에 맞춰서 투쟁해야 한다. 그리고 툴툴 거릴 게 아니라 자본이 연대하는 것의 반의반이라도 연대하면 분명히 그렇게 풀린다. 불가능한 싸움은 없다.

김규항 = 열번 백번 생각해도 결국은 연대다. 1500일 안에 승리하기 위해 ‘100일 집중투쟁’을 벌이고 있고 ‘시민 1500인 선언’도 조직하고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연대하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묻는다. 참 힘든 상황인데 이렇게 살아온 걸 후회하는가.

유명자 = 오히려 감사할 뿐이다. 나는 원래 운동권도 아니었고 학습지 교사 노릇하다가 ‘이건 아니구나’ 생각하게 되면서 노조에 참여하고 현장 간부하고 중앙간부하고 투쟁 사업장의 지부장까지 하면서 인간과 세상에 대해 많은 걸 배웠고 성장했다. 노동자로서의 계급의식과 세상을 보는 관점을 책이 아니라 현장에서 체득한 것도 스스로 대견하다. 이렇게 살지 않았으면 투쟁하지 않았으면 조금은 편하게 살 수 있었겠지만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볼 수 있었을까. 이명박보단 노무현이 훌륭하고 나경원보단 박원순이 훌륭하다는 생각 말고 뭘 할 수 있었을까.

김규항 = 마치 성공한 부자의 말처럼 들린다.

유명자 = (전화기를 들어 보이며) 난 정말 부자다. 투쟁으로 만난 이 소중한 인연들, 나를 위로하고 내 삶을 정화시켜주는 이 사람들이 얼마나 큰 재산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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