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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가난한 아이들 최면거는 ‘거짓 희망’ 대신 ‘아픈 현실’ 일깨워 줘”

김중미씨(48)는 1987년 빈민운동을 하기 위해 인천 동구 만석동에 들어갔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노동 현장과 ‘민중의 삶’의 현장으로 투신했던 수많은 청년들처럼 말이다. 그로부터 25년, 대개의 청년들은 돌아와 중산층 시민으로 살아가거나 수구기득권 세력과 정권, 사회적 헤게모니를 두고 경쟁하는 또 하나의 기득권 세력이 되었다. 하지만 김중미씨는 여전히 그곳에 있다. 김중미씨는 누구보다 행복한 얼굴을 한 채 ‘어릴 적 꿈을 이루었다’고 말한다.

김규항 = 1987년에 만석동에 들어왔으니 25년째다. 운동의 의미를 넘어 여기서 계속 살 만한 어떤 가치가 발생했다는 건데.

김중미 = 처음 들어올 생각을 할 때 빈민운동 쪽 선배가 그런 이야기를 했다. “네가 나중에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그 아이까지 빈민으로 만들 자신이 있으면 가라.” 당연히 “네”라고 했는데 그게 내내 화두가 되고 세월이 되었다.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공부방 ‘기찻길 옆 작은학교’에서 ‘큰이모’로 불리는 김중미씨가 지난 8일 인천 만석동의 학교 건물 앞에서 인터뷰 도중 웃고 있다. 벽화는 공부방 아이들이 그린 것이다.


김규항 = 1987년의 운동권은 곧 혁명이 다가올 것만 같은, 한창 긴박한 분위기였는데.

김중미 = 선배들이 거기서 그러고 있지 말고 서울로 올라오라고 여러 번 했는데 도저히 못 가겠더라. 1988년에 공부방을 시작했다. 굉장히 힘들었지만 어머니들이 믿어 주고 ‘쟤네들 뭐지’ 하며 신기해하면서 기대기도 하고 자신들의 삶을 나눠주고 하는 것들이 나를 붙들었다.
빈민운동을 하러 들어왔으니 처음엔 빨리 조직을 만들어야 하고 뭔가 가시화된 걸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제대로 된 운동권 출신이 아닌 건지 내가 위에 서서 주민을 조직하고 공부방을 열자마자 부모회를 만들고 하진 않았다. 아이들과 여름캠프 간다고 어머니들과 모이고 ‘성탄잔치 해요, 우리’ 하면서 모이고 하다 보니 어머니들도 덜 긴장했다.
그리고 같이 들어온 후배들도 가난하게 자란 과거가 있거나 뭔가 상처가 있는 친구들이 남게 되고, 별로 잘난 것도 특출난 것도 없는 사람들끼리 활동하다 보니 오래 가게 된 것 같다.

김규항 = 그 세월 동안 ‘절대빈곤’은 많이 가셨지만 가난의 의미, 가난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많이 변했다. 옛날엔 가난한 축에 들면서도 이웃과 함께 건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이젠 가난한 사람은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길 것을 강요당한다.

김중미 = 예전에는 가난한 동네가 굉장히 생명력이 있었다. 이 동네도 전과자들도 많고 마약하는 사람들까지 있어서 경찰차가 만날 상주할 정도였고 굶는 사람도 있었지만 사람들에게선 삶의 에너지가 있었다.
그런데 IMF를 기점으로 신자유주의가 본격화하면서 많이 변했다. 사람들의 삶의 방식은 도시빈민 지역도 그냥 중산층 시민들과 별로 다르지 않다. 소비하는 거다. 이 사회에서 내가 뒤처지지 않게 사는 방법은 남들이 가진 걸 갖는 것이니까. 그런데 이게 물 위에 켜놓은 양초처럼, 위는 화려하지만 밑은 뿌리도 없다. 다들 빚더미에 눌려 살아간다. 우리가 처음 왔을 때와는 전혀 다른 가난이다. 우리는 사라져버린 뿌리를 다시 심는 싸움을 하는 셈이다. 더 지루하고 더 지난한 과정일 수밖에 없고 그래서 더 가난한 사람들을 포기할 수 없다.

김규항 = 가난이라는 게 그 방향에 따라 의미가 전혀 다르지 않은가. 사회구조에 의한 가난은 부수어야 할 악이지만 ‘자발적 가난’이나 무소유 정신은 인간의 가장 품격 있는 태도인데, 이젠 돈 귀신이 들린 세상에서 어지간히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사람들조차 가난에 대한 공포와 불안감에 쩔쩔매며 살아간다.

김중미 = 우리도 이제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고 그런 상황 앞에서 막막할 때가 있다. 그렇지만 이걸 포기하면 내가 사람이기를 포기하는 것이고, 가난한 사람들이 사람답게 존재감을 갖고 사는 세상이 올 거라는 우리의 처음 희망도 버릴 수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에겐 가난하기 때문에 지켜지는 게 있다. 함께할 수 있는 힘.

김규항 = 부자에겐 없는 힘이다. 공부방 아이들도 많은 변화가 보일 텐데.

김중미 = 가난한 아이들이 처한 상황이 부초다. 어떤 때는 정말 풀풀 날아다니는 것처럼 보인다. 예전에는 어머니들도 다 몸을 써서 살았던 분들이고 아이들도 그걸 보고 자랐기 때문에 가난에 대한 두려움도 없었고 오히려 공동체성이 살아있고 이랬는데 이젠 아이들의 성장이나 교육이 돈 있는 사람들과 없는 사람들로 딱 갈라져서 규정되어 버렸고 가난한 아이들의 뿌리를 앗아가 버렸다.
하지만 그런 무기력함 속에서도 아주 잠깐씩 반짝하는 순간들이 있다. 그 반짝이는 순간을 보는 것, 그 순간을 조금씩 늘려가는 것이 우리의 희망이다.

김규항 = 처음 공부방에서 지내던 아이들은 이제 서른, 마흔이 되었다. 당신들과 공부방이 없었다면 그들의 삶은 달랐을까.

김중미 = ‘우리가 뭘 했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서른다섯 된 친구가 ‘공부방 때문에 나쁜 짓을 할 수 없다’는 이야기는 하더라. 이젠 멀리 떠나 뭣도 없고 몸뚱이밖에 없는 놈들이 세상을 헤쳐 나가야 하는데, 결혼해서 애도 낳고 식구도 먹여 살려야 하는데, 멈칫하는 순간이 있다는 거다. 또 그 아내 되는 사람이 그러더라. 남편이 만석동에 오는 건 두 가지다. 뭔가 자랑할 게 있거나 좋아서 나누고 싶을 때, 아니면 너무 힘들 때다. ‘세상은 다 변하는데 여기만 안 변하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가끔 한다.

김규항 = 이 인터뷰에 응하는 것도 전체 회의를 통해 결정했다고 들었는데 모든 문제들을 그렇게 결정하나.

김중미 = 매주 목요일 회의에서, 모이기 어려운 사람은 전화로라도 참여하여 결정한다. 사실 생각들이 비슷해서 큰 의견 차이는 없는 편이다. 이를테면 희망버스 문제라 할 때, 다들 타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다. 의견이 부딪히는 거의 유일한 경우는 공연 준비할 때다.


김규항 =
창작 작업이니 당연하다. 매해 열리는 기찻길 옆 작은학교 공연은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지만 근래에는 인형극 공연으로 더 유명하다. 내용도 좋고 기량도 빼어난 편인데.

김중미 =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 2000년 즈음인데, 처음에는 그냥 아이들하고 노는 거였다. 연극 같은 건 쑥스러워 하니까 인형을 내세워서 하게 되면 애들이 좀 더 자기 이야기를 수월하게 하고, 노래라든가 춤이나 다양한 걸 섞어서 정말 버라이어티하게 보여줄 수 있었다. 인형을 만들고 조작하고 무대에 올리기까지 여러 사람이 협동해야 하는 작업이라는 것도 우리와 맞았다.
춘천 인형극제에서 상도 받고 거기에서 전문 인형극단과 견주어도 주제나 기술이나 뒤지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면서 아이들이 자부심도 갖게 되었다. 우리 눈에 ‘이 녀석은 딱 이게 맞아’ 이런 애들도 생기고 아이들이 자기들이 갖고 있는 가치를 나눌 수 있는 게 참 좋다.

김규항 = 아이들이 같이 창작하고 공연도 많이 하러 다니는데 삶의 치유효과 같은 게 있지 않을까.

김중미 = 새로운 작품을 시작할 때마다 아이들이 몸이 반응하고 일어나는 걸 본다. 연습하려면 힘들고 함께하면서 갈등도 있고 투덜거리지만 천천히 일어난다. 아이들이 그런 에너지를 일상 속에서 지속하는 건 쉽지 않지만 공연을 할 때마다 ‘이런 거였지’ 하고 몸을 일으켜서 멋지게 공연을 끝낸다. 그게 거듭되면서 아이들의 성장에 거름 역할을 하면 좋겠다.

김규항 = 한국 교육은 아이들이 대학입시를 통해 아이가 얼마짜리 인간인가를 평가하는 19년 동안의 과정이 되었다. 그러다보니 부자들이 고도로 발전한 사교육을 통해 자기 아이들의 성적을 비정상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려서 전처럼 가난한 집 아이가 열심히 공부한다고 따라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런 경쟁에서 가난한 아이들은 절망적인 상황인데.

김중미 = 안타까운 건 가난한 아이들이 사회로 나가기 전에는 그걸 모른다는 거다. 어떻게 보면 현실을 직시하지 않으려는 심리도 있고. 요즘은 소비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표현하는 시절이니 아이들도 내가 공부를 못해도 우리집이 가난해도 노스페이스 점퍼 24만원짜리를 입고 있으면 다른 사람과 똑같아진다고 생각을 한다.
자기의 열등감이나 자괴감은 너무나 깊은 곳에 꾹꾹 눌려 있기 때문에 예전에는 공부 못하고 뭣도 없는 놈들이 깡이라도 있고 여차 하고 부딪쳐 보려는 거라도 있었는데 이젠 없다. 그걸 우리는 잔인하게 일깨워주는 입장이 되어야 한다.

김규항 = 워낙에 불공정한 현실이 압도적인 상황이다보니 ‘긍정의 힘’이니 뭐니 하는 식의 거짓 희망으로 사회구조에 의해 짓눌리고 배제되는 사람들을 최면에 빠뜨리는 이야기들도 많다. 현실을 일깨워주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현실을 살아가는 힘을 만들어주는 유일한 방법이다.

김중미 = 아이들이 그런 최면에 사로잡혀 살아가길 바라지 않는데 학교에서도 어디에서도 해주지 않는다. 그렇게 현실을 직면하게 하는 거랑, 어차피 가난한 부모에게 의지하지 않고 혼자 살아야 하니까 혼자 사는 방법을 이야기해주는 거랑. 나는 아이들이 열등감이나 자괴감을 자각하고 살면 참 좋겠다. 그러면 뭔가 오기라도 있을 텐데, 우리 사회는 그 오기마저 못 갖게 하고 그렇게 계속 마취시킨다.

김규항 = 사악한 사회다. 공부방 이모·삼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나 방식도 아이들에겐 참고가 될 텐데.

김중미 = 아이들이 우리 사는 걸 봐왔으니 우리 이야기도 한다. “이모·삼촌들이 ‘찌질하게’ 살지만 함께 살면 이렇게도 갈 수 있어.” 그러면 “난 ‘찌질하게’ 살고 싶지 않아요” 하고 야무지게 이야기하는 아이들도 있다. 후배 아이가 서울의 어느 교육 공간에 참여도 하고 그러는데 그쪽 선생들이 그러더란다. ‘여기 수업 말고도 훌륭한 분들 많이 들락거리시니까 아무 때나 와서 이야기도 하고 듣고 그래라.’ 자기는 속으로 그랬다고 하더라구요. ‘우리 공부방 이모·삼촌들이 이름도 없지만 누구보다 더 훌륭한 사람들인데.’ 어느 쪽이든 현실에 대한 그런 야무진 자각이 좋다.

김규항 = 아이들에게 어떤 의식을 심어주거나 하진 않지만 공부방과 이모·삼촌들이 간직한 가치들이 아이들에게 알게 모르게 영향을 주지 않는가.

김중미 = 아이들은 대학에 가거나 진로를 정할 때 참 희한하게도 특수교육과나 사회복지학과, 유아교육과 같은 데를 선택한다. 아이들이 장래희망 같은 게 얼핏 보기엔 요즘 여느 아이들과 다르지 않아 보이는데 좀 차분하게 이야기를 나누면 ‘사람에 관한 일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김규항 = ‘사람에 관한 일’이라. 아이들로선 그런 일들이 옳다, 그르다 판단하기 이전에 멋져 보인다는 건데.

김중미 = 예를 들어서 1차 희망버스 때 우리 아이들이 갔는데 그때 영도조선소 담장을 넘지 않았나. 아이들에겐 그 상황이 너무 멋있었단다. 그런 체험이나 느낌들이 쌓이면서 막연하지만 ‘사람에 관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다.

김규항 = 25년 전 수많은 청년들이 노동현장과 ‘민중의 현장’에 투신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돌아갔다.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고 새로운 기득권 세력이 된 사람들이 있다. 남은 사람으로서 그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김중미 = 어린이 책 관련해서나 지역에 강의 같은 데 가서 비슷한 또래들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청년 시절에 가졌던 가치를 소박하고 겸손하게 자신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구현하려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 사람들 보면 부끄럽다는 생각도 들고 희망도 느낀다.
그러나 그런 운동의 이력을 기반으로 정치를 하거나 진보교수나 진보지식인으로 행세하면서 ‘세상이 변했다’느니 ‘계급은 철 지난 이야기’라느니 강변하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많이 불편하다. 정치를 하든 지식인 활동을 하든 자신의 기반이 된 사람들, 민중들의 손을 놓으면 스스로 끝 아닌가. 그런 사람들을 보면 화가 나는 걸 넘어 불쌍하기만 하다.

김규항 = 이명박과 수구세력은 더 이상 우리를 현혹할 수 없으니 그들이야말로 가난한 사람들의 적인지도 모른다. 모든 책임을 이명박이나 수구세력에게 돌리며 ‘진보개혁세력’이라 불리는 또 하나의 기득권 세력. 당신과 동료들은 그런 기득권을 갖지 않았기에 진정 자유로운 게 아닐까. 25년의 선택을 반추한다면.

김중미 = 힘들고 불편한 일도 많았고 여전히 그렇기도 하지만 참 좋았다. 어릴 때 가난하게 살았지만 집이 문학적인 분위기가 있었고 학교 가기 싫을 때는 아버지가 나 데리고 휙 소풍을 가기도 하고 이웃 사람들과 잘 지내고 주인집 아줌마랑 옆집 아줌마한테 재미있는 이야기도 듣고 하는 그런 게 너무나 좋았다. 어른이 되어서도 작은 집에서 가난한 사람들끼리 모여 살아가야지 꿈꾸곤 했다. 난 어릴 적 꿈을 이룬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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