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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민중의 싸움터에 힘을 주는, 나는 파견 미술가”

경기 안성시 보개면 시골마을에 이윤엽의 소박하지만 멋스러운 작업실 겸 집이 있다. 다 쓰러진 폐가를 이윤엽이 8개월이나 손수 매달려 살려낼 때 동네 사람들은 ‘밀고 다시 지으면 될 걸 왜 사서 고생을 해’라며 혀를 찼다. 그가 밖을 돌아다니다 눈에 띈, 온갖 버려진 물건들을 실어다 마당에 쌓아놓자 사람들은 그를 동네에서 내쫓을 걸 고민했다.
언제나 노동자와 농민을 그리는, 평택 대추리에 용산에 한진중공업에 이 나라 민중의 싸움터엔 어김없이 자신을 ‘파견’하는 그는 민중미술의 영락없는 계승자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는 민중미술에 대해, 민중에 대해 끝없이 회의하고 질문한다. 목판화를 닮은 묘한 얼굴로.


▲ “민중이 특별히 건강하다 생각해본 적 없어”
▲ “민중이든 지배계급이든 어느 한쪽만 일방적으로 선하다는 생각은 억지”
▲ “현장이 내 그림의 힘… 나도 현장에 힘을 준다”

김규항 = 작업 환경 때문에 일부러 시골을 선택한 건가.

이윤엽 = 아니다. 짐은 많은데 돈은 없고 해서 다른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작업 환경 때문에 시골을 선택하는 작가들도 있지만 내 경우는 그런 이유라면 오히려 도시 변두리 같은 데, 시장이나 사창가 같은 게 남아 있는 곳으로 가면 좋겠다. 근래 작가들이 노동자 정년 나이쯤 되면 시골로 오는 게 법칙처럼 되었는데 나는 그 나이가 되면 거꾸로 도시 변두리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김규항 = 창작의 현장성이 연령대에 따라 일원화하는 건 그리 좋은 현상이 아닐 것이다. 요즘에야 시골 사람들도 다 주변화한 도시인처럼 되어버렸지만 시골 노인들에게 그나마 농적(農的) 삶의 흔적 같은 게 보이지 않나.

이윤엽 = 대화하다 보면 순간 찡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아까도 요 밑에 사는 할머니가 파를 뽑고 있기에 “지금 파를 왜 뽑으세요, 팔 거예요?” 그러니까 “아니 파는 게 아니라 날이 더 추워지면 파를 뽑을 때 딱딱 부러져. 그래서 미리 장갑도 손도 다 젖었지만 지금 뽑아야 해. 파 좀 가져가라” 하시는데 참.

김규항 = 옛 민중미술에서 말하는 ‘민중의 건강성’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이윤엽 = 난 민중이라는 사람들이 특별히 건강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내가 목판화를 하고 노동자를 그리고 농사꾼을 그리니까 사람들은 나더러 민중미술 한다고 하는데 민중미술이 뭔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한창 때 민중미술에 대해 어떤 회의 같은 것도 있다. 민중에 대해 정말 고민했다면 머리에다 빨간 띠 씌우고 주먹 불끈 쥐는 식의 상투적 형상화는 아니지 않았을까 싶은 거다. 이름 없는 분들 중에도 훌륭한 민중미술가들이 있었다는 것도 되새기고 싶다.
언젠가 1980년대 목판화들을 복사본으로 다 모아봤는데, 나도 이걸 하다 보니 정말 진정성 있게 했구나 싶은 분들은 느껴지는데, 그런 분들이 많더라.

김규항 = 그런 분들도 있고 몇몇 작가들은 민주화 이후에 미술시장에서 ‘민중미술’이라는 장르로 수집가들의 선택 목록이 되기도 했다. 역사란 늘 그런 것 같다. 진보적인 인텔리들은 자신의 사회적 관념을 민중에게 투사하려는 속성이 있고 1980년대 민중문화운동에선 그게 폭발했다. 건강하고 순박하기만 한 민중. 그렇게 민중을 미화하다가 시간이 흘러 관심이 바뀌면 민중을 언급하는 것조차 낡고 촌스럽게 여긴다. 우스운 일이지만 결국 같은 모습이다.

이윤엽 = 이해가 잘 안 간다. 그런 행태 이전에 민중이든 지배계급이든 어느 한쪽의 인간들이 일방적으로 건강하고 선하다는 생각부터가 억지스럽다. 사람에겐 사람으로 살아가는 공통된 속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미화할 것도, 무시할 것도 없다.

김규항 = 지배와 피지배, 착취와 억압의 관계에서 사회적 선악을 말하는 것과 인간 개인의 선악을 말하는 건 차원이 다른데 혼동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민중의 대상화와 미화도 결국 그런 맥락에서고. 애초에 미술을 하게 된 사연은 뭔가.

이윤엽 =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어릴 땐 사람이 어떤 일을 하면서 살아갈지 사회가 다 정해주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서 뭘 하며 살아야 할지 얼마나 고민했는지 모른다. 고등학교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는 줄창 놀다가 극장 간판 몇 년 하다가 건축현장에서 막노동을 몇 년 했다. 화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에 뒤늦게 미대에 갔다. 주변이 민중미술을 하는 선배들이 많았는데 그들의 작업이나 분위기에 선뜻 공감하기 어려운 데가 많았다. 그런데 그림만 그리면 나도 모르게 비슷한 걸 그리게 되더라. 그럴 순 없다고 생각했다.

김규항 = 민중미술의 대의에 대한 거부감이었나.

이윤엽 = ‘노동해방’이나 ‘민중해방’ 같은 구호에 쉽게 동화되지 않았다. 동화되지 않는데 그런 그림이 그려지는 게 너무 괴로워서 그림을 포기했다. 그러다 IMF 사태(외환위기) 때 전통찻집을 몇 년 했다. 개량 한복 입고 앉아서 안에다 개 한 마리 풀어놓고. 손님 적을 때 간간이 목판화를 하기 시작했는데 2002년에 우연찮게 개인전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벽에 걸린 내 그림에 내가 ‘뻑갔다’.

김규항 = 정말 말 그대로 뻑갔나.

이윤엽 = 재수 없게 들려도 할 수 없는데 정말 뻑갔다. 좋다, 이젠 할 수 있겠다 싶었다.

김규항 = 그림을 포기할 때도 민중미술이었고 지금도 노동자와 농부를 그린다.

이윤엽 = 예술은 낚시 같은 거라 생각한다. 물론 1년이 걸리든 2년이 걸리든 해야 되겠다는 작업도 있지만 결국 그것도 어느 찰나에 딱 낚이는 이미지들이 있다. 그게 도대체 왜 낚이는가 생각해보면 살아온 건 어쩔 수 없구나 싶다. 노동자와 농사꾼을 그리게 되는 건 내 부모와 이웃과 나 스스로가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김규항 = 예술가란 자신이 체험하지 않은 걸 그려내는 상상력의 존재이기도 하지 않은가.

이윤엽 = 재능이 좋은 분들이고, 난 내가 보고 겪은 것들 안에서만 이미지가 떠오른다. 그러니 그런 것만 그리게 된다. 물론 상상력이라는 게 있지만 그 상상력의 범주 역시 어떤 수준을 넘어서진 못하는 것 같다. 내 한계라고 할까.

김규항 = 나는 내가 느끼고 본 것만 그린다, 나는 리얼리스트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는데 굳이 한계라고 하는 건 예술가 특유의 자의식으로 느껴진다. 선생 그림에선 어린 시절을 건강하게 보낸 사람만의 기운이 느껴진다는 사람들이 있다. 어땠나.

이윤엽 = 정말 끝내줬다. 나를 키워준 팔할은 우리 동네에 있던 저수지와 냇가, 그리고 동무들이었다. 늘 거기에서 놀았다.

김규항 = 가난했나.

이윤엽 = 엄청 가난했다. 아버지는 실직자였는데 이따금 일용직 일 가시고 어머니는 닥치는 대로 일했다. 우리 집만 가난한 게 아니라 그 동네가 ‘하꼬방 동네’였다. 수원 시내에서 밀려난 사람들, 근처 삼성전자의 ‘공돌이 공순이들’이 방 한 칸씩 다닥다닥 붙어사는 동네였다. 그러나 내 어린 시절은 완벽했다. 마음껏 놀았으니. 요즘 애들 정말 어떻게 사는 건지 모르겠다. 가난해도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다는 걸 부모들이 잊은 것 같다.

김규항 = 대추리 싸움 때 2년 들어가 살았고 용산에도 결합했고 언제나 투쟁 현장과 결합한다. 그런 현장에서 벌어지는 사건들과 작가로서 감정선은 어떻게 조우하는가.

이윤엽 = 물론 슬프다. 그런데 그 슬픔이 지나치게 적다는 생각이 들어서 힘들 때가 있다. 사람들이 나를 껴안고 막 우는데 난 눈물이 안 나올 때 난 왜 이럴까 사이코패스인가 숨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문정현 신부님 보면 울고 화내고 뒤집어지고 하시는데 조금도 과장이 없다. 나도 저럴 수 있다면 저렇게 한번 갈 수 있다면 끝내주는 작품이 나올 것 같은데 싶을 때가 많다.

김규항 = 선생의 작품들에 그려진 현장의 슬픔과 분노는 전혀 밋밋하지 않다. 작가에겐 여느 사람보다 대상에 온전히 스며드는 감성도 필요하지만 작가적 관점을 유지하는 거리두기의 힘도 필요하다. 민중을 대상화하지도, 미화하지도, 슬픔과 분노를 과장하지도 않는 것은 슬픔과 분노를 온전히 형상화해내는 힘일 수 있지 않을까.

이윤엽 = 동감하지만 나에겐 그런 열등감이 있다. 창작이란 일종의 오버이기도 하니까.

김규항 = 사람들은 선생이 그 현장의 슬픔과 분노에 누구보다 불타올라 있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불타오르지 않고는 그렇게 성실하고 열정적으로 결합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아니라면 그런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동력은 뭔가.

이윤엽 = 재미와 즐거움. 현장은 물론 슬픈 일투성이지만 내가 뜨면 사람들이 좋아하고 그러면 나도 좋다. 현장이 내 그림에 힘을 주고 내가 현장의 사람들에게 힘을 준다. ‘내가 뜨면 싸움은 이겨’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떠벌리고 다닌다. 요즘 싸움이라는 게 이겼다고 해도 애매한 절충과 타결인 경우가 많지만 그래도 파견 미술가들이 싸움의 에너지를 만들어낸다는 게 난 좋다.

김규항 = ‘파견 미술가’는 파견 노동자에서 따온 말인가.

이윤엽 = 용산 싸움 할 때 대우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몇 년째 싸우고 있었다. 그런데 가만 따지고 보니 제일 어렵게 사는 건 미술가들이더라. 용산 유족 분들도 큰 가게를 했던 분들이고 대공장 비정규직도 우리보단 낫고. 비정규직 가운데서도 가장 열악한 게 파견 노동자더라. 그래서 농담삼아 ‘우리는 파견 미술가네’ 한 게 우리 이름이 되고 활동이 되었다. 파견 미술가라는 게 투명 자동차 같은 거다. 탑승자가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미술가가 아닌 사람들도 있고 누가 한 사람 올라타면 시간이 되는 사람들 함께 타고 가서 리본도 묶고 그림 설치도 하고.

김규항 = 공공미술은 미술가들이 그룹을 만들어 지자체나 기업과 결합해서 체제 내적인 활동을 하는 경향이 있는데, 파견 미술팀이야말로 공공미술의 본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생계는 어떻게 해결하는가.

이윤엽 = 열심히 뭐든 한다. 결혼을 늦게 했는데 아내가 내가 생활 문제에 예상보다 엄청 투철해서 좋다고 하더라. 벽화고 삽화고 다 해서 살 것 사고 카드 값도 막고 그렇게 남들과 다름없이 살림을 꾸려간다. 그래도 요즘은 출판 쪽 일이 많아져서 밖에서 험하게 일하는 경우가 조금은 적어졌다. 사무직 노동자들도 참 힘들게 사는구나 새삼 배우게 되었고.

김규항 = 요즘 사람들이 살아가는 걸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이윤엽 = 사람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물론 소수의 부자들이 아니라면 산다는 건 언제나 힘들고 만만치 않다. 그러나 행복이라는 건 큰 게 아니지 않은가. 이렇게 있다가 밖에 나갔는데 바람이 쫙 불고 뭐가 팔랑팔랑 움직이는 거 보면 불현듯 ‘행복하다’는 느낌이 드는 그런 게 아닐까. 나는 어릴 때도 가난했지만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한 걸 보면 훨씬 많은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김규항 = 행복이란 선생이 말한 그런 것일 텐데 이젠 기억하는 사람이 잘 보이지 않는다. 끝없이 경쟁하고 불안해함으로써, 경쟁과 물적 축적 속에서 행복을 향해가고 있다고 생각하니 누구도 행복하지 않은 세상이랄까. 물론 그건 개인의 타락이나 속물화가 아니라 자본의 지배방식이니 간단치는 않은 문제다. 민중미술 이야기를 마무리해보자. 민중미술에 대한 선생의 회의와 질문은 결국 민중미술에 대한 열망 아닌가. 혹시 진행 중인 나름의 구상 같은 게 있는가.

이윤엽 = 후진 예술이라는 게 있다면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자기를 드러낸 예술치고 민중미술 아닌 게 어디 있는가. 주먹 불끈 쥐고 머리에 띠 두른 것 말고 정말 민중이라는 걸 형상화해 보고 싶다.
이 이야기를 하는 순간 옆집 할머니, 할아버지의 방이 떠오른다. 이쪽에 손주 사진 액자 붙여놓고 모조 꽃 이만하게 담아놓고 저쪽에 단지 놓고 하는 그들 나름의 인테리어. 농사꾼들이 방에 바람막이로 사료 부대나 비료 부대를 붙이는데 아무렇게나 붙이지 않는다. 사료 부대 여기다 붙이고 비료 부대 저기다 붙이고 또 임시로 붙여놓고선 멀리 떨어져서 보고 다시 고쳐 붙인다. 그런 미의식을 추적하다 보면 뭔가 근사한 게 나오지 않을까.

김규항 = 이미 추적의 흥겨움이 느껴진다.

이윤엽 = 민중미술에는 많은 훌륭한 선배들이 있었고 이제 민중미술은 저수지다. 예술은 수만가지의 형식과 방법이 있고 그 모든 예술을 다 존중한다. 그러나 내가 하고 싶은 예술은 고여 있지 않은 것, 작게라도 졸졸 흐르는 것이다. 나는 강을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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