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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 가면 다른 도시와는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한 감흥에 아니 젖을 도리가 없게 된다. 3시간 전의 서울시민에서 벗어나 천 년 전의 신라인으로 변신해 보는 것이다. 김광석의 노래처럼 두 바퀴로 가는 버스를 타고 성동시장에 가면 포수에게 잡혀온 잉어가 눈을 껌뻑거리며 한숨을 쉬고 있을 듯. 구름이 낮게 깔린 아리송한 도시. 저 구름은 서라벌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그제는 조금 색다른 풍경에 몸을 담갔다. 무덤이 광장을 지키고 있는 신경주역에 도착하니 오후 3시30분. 나의 일생을 하루에 요약해 볼 때, 지금의 내 나이가 오늘의 이 무렵이 아니겠는가. 그냥 맥없이 허둥대다가 전기문명이 제공하는 어지러운 도심의 불빛에 속절없이 포박되기는 싫었다. 얼른 몸을 날려 칠불암으로 향했다. 몇 개의 무덤과 몇 개의 탑을 지나 찾아드니 동지를 며칠 앞둔 공중은 벌써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분위기였다. 초행은 아니었기에 무서울 건 없었다. 보름달도 믿었다. 돌부리에 걸려 자빠지면 또 어떠랴. 남산에서 넘어졌으니 남산을 짚고 툴툴 일어나면 될 일이다. 사위질빵이 돌담을 기웃거리고 있는 초입의 농장을 지나니 호젓한 오솔길 좌우로 소나무가 빽빽했다. 활성탄층을 통과하며 꾸정물이 정화되듯 나는 이 훤칠한 숲을 지나가며 마음을 세탁하는 중. 갈비뼈를 훑고 나오는 숨결도 몸속 노폐물을 바깥으로 뱉어내는 중.
드디어 가파른 돌계단이 보이고 울창한 이대가 칠불암에 다 왔음을 알려준다. 이제 조금 후면 국보 312호 마애석불 앞의 야단법석에서 108배를 올리고, 환장하게 좋아하는 칠불암 툇마루에 시린 엉덩이를 부려놓으며 보름달을 볼 수 있겠다. “크게 한번 후, 하고 숨을 내쉬세요.” 나무에 붙은 안내문 옆에 으름덩굴이 창백한 잎사귀를 아직 달고 있다. 부처님 손바닥 같은 편평한 5~6장의 잎이다. 으름덩굴은 혼자 설 수 없어 생강나무를 타고 올랐다. 땅을 기어야 하는 덩굴성이었지만 곁의 나무를 짚고 공중으로 박차고 뛰어오른 것. 나도 저 으름덩굴처럼 몸을 가볍게 엮고 엮어서 오늘밤엔 토함산 위 보름달로 훌쩍 건너가 볼까나! 으름덩굴, 으름덩굴과의 덩굴성 나무.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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