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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이 꿀렁, 하였다. 꽃이 핀 것이다. 햇빛과 비바람, 천둥과 번개가 합심하여 한 송이의 꽃을 공중에 틔워내었다. 꽃은 식물의 생식기관이라고 하지만 그건 저희들끼리의 내밀한 사생활에 속하는 영역이다. 당장 눈앞에 드러난 사실은 꽃이 이 지상의 한 매듭이라는 것. 꽃이 아니었다면 뉘라서 우리 사는 세상을 이렇게 맵시 있게 마무리할 수 있으랴. 그제는 시간이 꿀렁, 하였다. 역사가 회오리를 친 것이다. 이제까지 쌓이고 쌓인 적폐가 민낯을 드러내고 한 매듭으로 묶였다. 누구는 끝이라고도 하지만 어림없는 일이다. 세상을 향한 포부를 가득 담은 꽃봉오리가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서야 비로소 만개(滿開)로 이어지듯 먼 길로 가는 첫걸음을 뗀 것일 뿐이다.
가슴속으로 밀려드는 그 어떤 후련한 마음과 함께 부산으로 돌진하는 기차를 탔다. 그것도 새벽 첫 기차이고 보니 앞장서서 어둠을 뚫고 간다는 호쾌한 기분을 덤으로 얻었다. 장산, 황령산, 금정산 등 부산에는 덩치가 큰 산이 많지만 오늘 걷는 길은 오륙도에서 이기대로 이어지는 바닷가 해파랑길. 기암괴석이 즐비한 가운데 옛날 뜨거운 마그마가 흘러 형성된 이곳은 우리 국토의 한 끝자락으로 국가지질공원이기도 하다. 더러 낭떠러지 모퉁이를 돌면서 그 연원을 잴 수 없는 억겁 년의 시간의 얼굴에 내 얼굴을 포갤 때 알 수 없는 전율이 일어났다. 밀려오던 파도가 딱딱한 바위를 깨울 땐 가슴 근처에서 작은 진동이 느껴지기도 했다. 해국, 갯고들빼기, 감국 등 오늘 본 꽃들의 목록이 초라하다고 여겨질 즈음 아예 이기대의 바닷가로 내려섰다. 건너편으로 해운대가 보이는 곳이었다. 파도에 닳고 닳은 몽돌 가까이에 노란 꽃 한 송이가 피어 있다. 형태도 색도 덜 자란 민들레처럼 보이더니 가까이 가서 보니 멱쇠채라고 하는 귀한 꽃이다. 본래 4~6월경에 피는 꽃인데 시절을 잘못 알고 바깥으로 나와서 어리둥절하게 서 있는 멱쇠채. 계절의 첫차를 타고 일찍 나를 마중하여 주는 꽃이라고 이기적으로 말할 수 있겠다. 이름이 낯설어서 입에 착 감기지는 않지만 잎은 미역을 닮고 꽃잎은 리본 같다. 그리하여 저 노란 꽃잎에 한 조각 붉은 마음을 적어보고 싶은 꽃, 멱쇠채. 국화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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