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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릅니다, 기억에 없습니다. 그는 마이크 앞에서 이 말을 반복적으로 했다. 자신의 말에 힘을 싣기 위해서인지 머리를 아래위로 까딱까딱하였다. 현대사의 주요 길목마다 어김없이 등장하여 모종의 역할을 했던 법률가답게 자신이 꾸민 조서에 인감도장이라도 찍는 동작인 것 같았다. 어쩌면 그리 재주도 좋아서 기억을 이렇게 잘 관리하고 있을까. 목구멍 너머 어딘가에 기억을 꼬불쳐놓았다가 필요에 따라서 꺼내어 써먹는 것일까. 하지만 어쩌나. 몸에도 기억이 있는 법이다. 입으로는 아니라고 하는데 몸통으로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희극적 광경으로 내 눈에는 비쳤다.

산은 적막하고 꽃은 없다. 병신년도 이제 마지막이다. 한 해의 기억을 더듬어본다. 많은 식물들이 내 눈을 통과했다. 올해 인상적인 것 중의 하나는 좁은잎덩굴용담이다. 한강의 발원지인 태백의 검룡소 근처. 단풍도 함성처럼 산하를 물들이고 난 시기. 관광객의 발길을 잠깐 벗어난 곳에서 만난 꽃이었다. 꽃동무의 외침을 듣고 어느 덤불 속으로 허리를 꼬부리고 들어갔지만 한동안 어디에 시선을 둘지 몰랐다. 한참을 헤맨 끝에 보일 듯 말 듯 쇠뜨기에 의지하고 있는 그 꽃을 겨우 발견했다. 내 눈에 놀라운 건 꽃이 아니었다. 잎도 아니었다. 좁은잎덩굴용담의 실처럼 칭칭 감기는 줄기였다. 보일락 말락한 작은 줄기에서 어쩌면 이리도 어엿한 여러 꽃들이 주렁주렁 연결되어 있을까. 몹시도 가는 줄기에서 이따만하게 달려 있는 호박을 보는 것과는 또 다른 감흥이었다.

“금강산 맑은 물은 동해로 흐르고…”를 노래하며 광화문광장에 모인 우리는 ‘홀로섬에 닻을 내린’ 주권자들이다. 함께 합창하니 입 모양도 같고,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율이 통하고, 그 어떤 힘이 뻗어나와 어깨와 어깨가 서로 연결되는 순간, 좁은잎덩굴용담이 떠올랐다. 가수 한영애의 이어진 노래는 ‘조율’이었다. “알고 있지, 꽃들은 따뜻한 오월이면 꽃을 피워야 한다는 것을….” 내년에도 변함없이 좁은잎덩굴용담은 더욱 뚜렷한 기억을 되살려 제자리에서 겨드랑이마다 또 꽃을 활짝 피우겠지. 좁은잎덩굴용담, 용담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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