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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승이 어딘지 똑똑히는 모르겠지만 이승은 햇빛이 지휘하고 관할하는 영역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직진하는 빛은 항상 내 곁에 그림자 하나를 세워둔다. 어릴 땐 가까운 친구이더니 이제는 언젠가 가야 할 곳을 지키는 보초 같다. 눈은 발광체가 아니라서 태양의 빛에 의지해서 사물을 보는바, 그 빛의 성질에 개입할 수 없음은 자명하다. 만약 눈에서 나가는 시선을 조절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어쩌면 나와 너 사이에 있을지도 모를 ‘섬’을 발견할 수 있을까? 

바로 눈앞의 세계가 불변인 척하면서 실은 깜쪽같이 변화하고 있다는 낌새를 최근에 눈치채게 되었다. 눈 한번 깜빡해도 세상은 조금 차이가 난다. 눈앞은 그냥 뻔하고 빤한 곳이 아니라 그야말로 변화무쌍의 현장이다. 시시각각 아찔한 절벽을 세우고 허물기를 반복한다. 불교의 공 사상, 물리학의 상대성이론, 철학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가 그것을 그렇게 말해주고 있다. 

우리의 눈은 대상이 없다면 본다는 것의 의미를 낚아채지 못할 것이다. 방정식의 미지수 χ나 실험실의 삼각플라스크도 다 마찬가지다. 추상이든 구체든 모든 생각이란 대상을 만나지 못하면 그 얼마나 천지허방을 헤매고 헤맬 것인가. 

그것은 물에 빠져 바닥을 딛지 못해 결국 익사하는 것과 같은 경우라 하겠다, 그런데.

늘그막에 운 좋게 스승을 만나 <韓國禪詩>(김달진 편역, 열화당)를 매일 한 편씩 읽으며 초서로도 써본다. 오늘치는 고려 스님 진각혜심(眞覺慧諶·1178~1234)의 작품이다. “欲知解脫道(해탈의 도를 알고자 하는가)/ 根境不相到(감각과 대상이 서로 닿지 않아야 하리)/ 眼耳絶見聞(눈과 귀의 보고 들음 끊어졌는데)/ 聲色鬧浩浩(소리와 빛깔이 부질없이 저들끼리 소란하네).”

햇빛과 눈빛은 그 근원이 너무나 다르다. 나는 고개를 좌우로 돌리면서 전방의 광경을 겨우 편집하면서 살아간다. 시선의 길이를 조절하지 못해 보이는 것만을 보아야 하는 인간의 눈은 슬프다. 그런데, 근경불상도라니! 저 구절이 나의 오래된 궁금증을 두드리는 것 같아서 무척 놀랐다. 옛 스님도 저런 의문을 품었기에 이런 시를 남겼을까, 희미하게 짐작해 보는 저녁.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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