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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거창 출신이다. 빨갛게 익은 거창사과를 옆구리에 붙인 채 달리는 버스를 경부고속도로에서 만나면 힘껏 쫓아간다. 험상궂은 옆차들이 끼어들어 우리 사이를 훼방 놓을 때까지.
작년 봄 거제도로 특산식물을 조사하러 가는 길이었다. 늑골 사이 묵은 먼지를 긁어내는 윤윤석의 아쟁산조가 끝나고 ‘세상의 모든 음악’이 시작될 무렵 인삼랜드 휴게소에 닿았다. 화장실에 들렀다가 불에 구운 흰 가래떡을 입에 물고 내 자리를 찾아가는데 방금 도착한 거창여객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내린다. 같은 햇볕을 쬐고 비슷한 성분의 물을 먹어서인가. 한 골짜기에서 뒹구는 돌멩이처럼 다들 닮은 인상이다. 아버지 모시고 갈 때 인삼랜드, 어머니 업고 갈 때 인삼랜드. 그 언젠가 이 휴게소에서 나만 못 내리는 상황이 오겠지. 그런 날도 가늠해 볼 때 덕유산을 비켜가는 석양이 도장이라도 찍는 듯 이마를 따끈하게 비추던 세상의 어떤 저녁. 올핸 고향에도 못 가고 벌초가 그냥 지나갔구나.
코스모스여, 아무래도 너하고는 너무 쉽게 헤어졌다. 탈탈탈 완행버스가 지나가면 밀가루 같은 먼지가 뽀얗게 찔레나무 잎에 얹히는 시골 등굣길. 가을이면 너는 너무도 당연하게 걸음을 맞추었지. 그사이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신작로는 아스팔트로 바뀌고 완대초등학교는 폐교가 되었다. 벌초하러 가도 너는 흔적조차 없다. 훌쩍 도회로 떠난 동무들을 따라 너도 멀리 이사하였는가. 멸종위기종인 고사리삼을 조사하던 길. 정읍의 한 논둑을 훑고 나오다가 길가에서 무우하게 흔들리는 너를 문득 발견했다. 허리 구부러진 노인이 머리를 숙이고 머지않아 들어갈 거처를 살피는 듯 낫으로 산소의 풀을 깎고 있었다. 코스모스가 참 좋습니다. 여쭈었더니 한참 만에 돌아오는 메아리 같은 대답. 꽃씨 모았다가 다음해 4월경에 뿌려줘. 너는 한해살이풀이라고 했던가. 옆에 무성히 있다고 그냥 저절로 또 나오는 게 아닌 줄을 뒤늦게 노인한테 배웠다네, 코스모스여. 그 무렵 채취해서 냉장고에 보관했다가 올봄 사무실 옆 화단에 뿌려둔 코스모스가 얼굴을 내밀었다. 너무 기특해 눈을 씻고 자주 보는 내 코스모스 옆으로 경자년 추석이 쓸쓸히 지나가고 있구나.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9290300025&code=990100#csidx53410402c60b160b203a609dad5112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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