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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겨울, 흰 눈이 펑펑 쏟아지는 청계산으로 번개산행을 했다. 약수터에서 뜨거운 차를 마시는데 누가 지나가는 바람에 말을 얹었다. 집을 나오기는 싫은데 산에 오면 어쩌면 이리도 좋죠. 눈 속에서는 소리가 더 잘 들린다. 우리 일행은 물론 지나가는 이들도 모두 맞다는 표정을 지어주었다. 산은 평범한 말도 이처럼 참 근사하게 만들어준다.

제법 오래전, 꽃에 입문하고 백두산에 간 적이 있었다. 며칠 함께 뒹군 룸메이트가 마지막 밤에 불쑥 물었다. 산을 무어라 생각하세요. 꽃에 한창 꽂혀 있느라 마음도 무척 알록달록했던 시절. 그저 밥상 위에 반찬처럼 내가 찾고자 하는 꽃들이 피어난 장소 이상은 생각하지 못하는 터였다. 겨우 어느 시 구절을 빌려 눈앞의 커다란 삼각형이라고 얼버무리는데 그는 정확한 답을 갖고 있었다. 산에 가면 집처럼 편안해요. 지게 작대기 옆에 앉아 있는데 나무하는 아버지의 휘파람 소리가 들려요. 혹 누가 꽃이냐 산이냐, 무식하게 묻는다면 당연 산이지요.

겪는다고 어디 다 내 소관이랴만 어느덧 전염이 되었나 보다. 제법 뻔질나게 산으로 다니면서 산이란 누구인가 하는 생각을 심심찮게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이런 느낌도 자연스레 찾아왔다. 바위는 언젠가 만나야 할 낯익은 얼굴들, 바람에 일렁이는 나뭇잎들은 어깨 걸고 뛰어나오려는 낯선 모습들.

최근에는 지리산에 다녀왔다. 눈 대신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이었다. 호두가 뇌를 닮았다고 하나 내 두개골도 펼치면 저 첩첩산중과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천왕봉에서 했다. 그리고 서울로 가는 고속도로. 나는 조수석에 앉았다. 그이는 산으로 갈 때는 신이 나서 속도를 높이는데 집으로 갈 때는 가장 천천히 빠르게 간다. 어둑어둑해질 무렵인데도 미등도 안 켠다. 차의 불빛 하나가 저녁에서 밤으로 가는 저 산의 장엄을 해치는 것 같아서 가급적 늦게 깨우는 것이다. 꽃잎 하나 떨어지니 봄빛이 그만큼 깎여나간다고 노래한 두보(杜甫)의 경지를 대체 어느 겨를에 터득한 것일까. 이 또한 나에게로 전염되기를 은근히 기대하면서 뻐근한 다리를 주무르며 한 생각에 잠기느니, 저 멀리 산은 대체 누구신가.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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