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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첫날 경향신문 1면은 일러스트(삽화)로 시작했다. 그물 위엔 로봇 서빙을 받는 사람이 여유로이 누워있고, 어느 ‘자리’를 뜻할 빈 의자가 얹혔다. 서류파일을 든 남녀와 휴대폰 보는 공장 노동자의 옷매무새도 말끔하다. 그물 밑에선 사람도, 오토바이도, 시곗바늘도 다 녹아내렸다. 배달 라이더는 휴대폰을 땅에 내려치고, 접시 든 가사도우미 어깨는 축 처졌고, 젊은 남자는 빈손으로 서서 양초처럼 타 녹고 있었다. 그 물 위로 작업화와 철가방이 떠다니고 손이 허우적댔다. 비온 땅의 죽순처럼 사방팔방 번져가는 플랫폼노동자의 시린 군상이고, “살려달라”는 절규이리라. 그물은 그들이 넘볼 수 없는 노동자 지위와 근로기준법, 사회안전망을 상징할 게다. 삽화 위엔 “노동이 녹아내린다”는 제목이 달렸다.

녹아내린다! 언제부턴가 스마트폰 앱이나 웹으로 지시·통제 받으며 하는 일을 학자들이 ‘액체노동’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공장·사무실에서 근로계약서 쓰고 일하는 전통적 고용관계를 ‘고체’로 빗댄 말이다. 저마다 개인사업자로 플랫폼에 묶여 돌아가는 이 노동엔 일터와 시급, 정해진 노동시간이 없다. 일감으로 돈 받고 그것을 다투며 하루가 질 뿐이다. 그들에겐 연차·유급휴가·퇴직금도 없고, 4대보험과 소득증명원이 없어 은행 대출도 제한된다. 설움과 삶의 불안은 차치하고 녹아내리지 않을 몸이 있을까.

디지털 막노동의 서사는 생생할수록 아렸다. “글자 하나에 20원, 사진은 1000원도 받고 5000원도 받아요.” 인공지능(AI) 학습 데이터를 입력하던 여성은 “인형 눈붙이기처럼 컴퓨터로 하루 10시간, 주 6일 일해 월 250만원쯤 번다”고 했다. 그는 “AI의 정확도와 속도를 높이는 인간부품이 된 느낌”이라고 했다. 나를 잡아먹을 호랑이를 키우고 있다는 두려움일 게다. 하루 14시간씩 달린다는 퀵서비스 기사는 “7년간 건당 배달비가 300원 올랐다”고 하소연하고, “내일도 오늘처럼 벌 수 있을까” 걱정했다. 가사도우미는 벌점 스트레스에, 웹소설 창작자는 플랫폼회사의 무료 연재 요청에 진저리쳤다. 포털에서 AI가 놓친 유해물을 잡아내며 최저임금(연 2091만원)보다 20만원 더 받고 있다는 20대 여성은 “다음이 없는 유령노동”이라고 했다. 녹아내리며 보이지도 않는 노동이었다. 일과 쉼의 경계가 없는 ‘무늬만 사장’이 정부 추계로도 55만명을 넘었다. 웹툰·방문판매·간병처럼 플랫폼에 속속 태워지고 있는 특수고용노동자는 국내 기준 160만명, 국제 기준 230만명이다.

천리·백리·십리 길에 싸는 봇짐은 다른 법이다. 답을 찾는 학자들이 그랬다. 천리 봇짐은 데이터·로봇·AI에게 세금을 물려 사회에 환원하자는 것이다. 기본소득이 그 범주다. 백리 봇짐은 정부 회의체(경제사회노동위·일자리위·4차산업혁명위)에서 미래의 기술·성장과 노동·기후위기·복지 문제를 함께 다루자는 것이다. 타다·택시 간 갈등을 보며 힘이 붙는 여론이다. 십리 봇짐은 디지털특고도 노동자로 인정하는 것이다. 1·2·3차 산업혁명이 상용화될 때까지 증기기관 80년, 전기 40년, 인터넷 20년이 걸렸고 AI는 10년이 고비라고 떠들썩하다. 그런 나라에서도 4·15 총선은 거꾸로다. 집권당은 노동공약이 없고, 제1야당은 주 52시간제를 무력화해 유연성을 높이자고 한다. 정책 의제가 뒷전인 선거에서 노동은 아예 실종신고를 해야 할 판이다.

켄 로치 감독이 만든 영화 <미안해요 리키>는 말로 시작해 눈물로 끝난다. “당신은 고용된 게 아니라 승선한 겁니다. 모든 게 본인의 선택이고….” 택배회사 사장이 각인시킨 독립과 자율은 한나절도 플랫폼에서 벗어나기 힘든 올가미로 바뀌고, 어쩌다가 소화하지 못한 일감과 차량 구입비는 빚과 벌점으로 쌓였다. 택배차를 덮친 불량배에게 얼굴이 퉁퉁 붓도록 맞은 날도 사장은 부서진 카드단말기 값만 챙겼다. 밤새 앓다 만류하는 가족들을 뿌리치고 새벽 일터로 차를 몰고 가는 리키의 마지막 얼굴에선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누구 잘못일까. 감독은 왜 미안하다 했을까. 영화가 불편하고 퍽퍽한 것은 ‘영국의 리키’와 ‘한국의 리키’가 닮았기 때문일 테다.

예나 지금이나 일은 세도 확실한 현찰을 쥐여주는 곳이 막장이다. 탄광과 노가다가 그랬고, 요즘은 하루 330만개의 상자가 오가는 택배창고가 그리 불린다. 50년 전 ‘전태일의 외침’은 오늘도 플랫폼을 따라 돌고 있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장애인이 편한 세상은 모두 편하고 여성이 행복하면 남성도 행복한 법이다. 눈물이 사라진 노동은 더 말할 게 없다. 더 더 낮은 곳으로, 노(勞)의 시선과 사(使)의 나눔과 정(政)의 리더십이 흘러야 한다.

<이기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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