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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충남 아산시 경찰인재개발원에서 코로나19로 입소했던 중국 우한 교민들을 태운 버스가 나오자 지역 주민들이 손을 흔들면서 환송하고 있다. 우철훈 기자

한 세기 전인 20세기 초만 해도 인류의 가장 큰 사망원인은 ‘감염병’이었다. 1900년 의학통계를 보면 사망원인 1·2·3이 ‘폐렴과 독감’ ‘결핵’ ‘설사’ 같은 것이었다. 전체 사망원인의 절반을 차지했다(<바디>, 빌 브라이슨). ‘현대의학’을 구원한 페니실린이 등장하기 전(페니실린의 발견은 1928년, 대량생산된 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이니 인류는 세균과 바이러스들에 속수무책이었다. 그저 튼튼한 몸을 믿거나, 감염되지 않길 기도하는 게 전부였다. 정체도, 대책도 알 수 없는 그 작은 것들은 인류에게 공포 그 자체였다. 그 ‘무지의 공포’는 ‘재앙’의 서막이었다.

무지의 정반대편에 인간의 ‘용기’가 존재한다. 때로 그것은 ‘희생’이라는 극적 모습으로 등장했다. 이를 통해 인류는 진보했다. 실상 감염병과의 싸움은 무수한 희생과 인간 용기의 위대함을 증거하는 과정이었다. 독일 기생충학자 테어로어 빌하르츠는 주혈흡충증을 알기 위해 자신의 배에 유충을 붙여 간으로 침입하는 과정을 살폈다. 미국인 의사 제스 러지어는 1900년 모기의 황열병 전파를 입증하려 쿠바로 갔다가 그 병으로 숨졌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전 세계의 많은 젊은 의학자들이 자신의 몸을 실험체 삼아 감염병들과 사투를 벌이다 세상을 떠났다.

‘코로나19’는 감염병 공포가 여전히 ‘현재형’임을 인류에게 각인시켰다. 다시 20세기 초 ‘감염병 원시’의 암흑시대로 되돌아가는 중이라는 비관도 있다. 항생제 남용 속에 코로나19 같은 변형 바이러스와 슈퍼 세균들이 속속 출몰하면서다. 정체불명의 이런 변종들은 지난 한 세기 ‘무지의 정복’이라는 인류의 자부심을 허물며 ‘편리’로 상징되는 현대문명에 의구심을 던지고 있다.

지금 하나의 종으로서 인간의 가장 큰 두려움은 ‘불편’일 수 있다. ‘편리’와 그것이 주는 풍요만을 진보로 여겨왔기에 다른 세상을 상상할 수 없다. 지금 인류는 사회·경제 현상 자체보다 그로 인한 불편과 풍요의 결핍에 더 깊은 불안감을 느낀다. 하지만 그 편리와 풍요는 ‘막다른 골목’을 예감하고 있다. 편리는 결코 인간 이성과 기술의 ‘선물’이 아니었다. 이 행성은 이제 그 대가를 요구하고 있다.

기후위기, 실업, 빈곤, 각종 재난과 이상 감염병 등 병적 징후들이 이 행성을 횡행한 지는 오래다. 온갖 종류의 재난 블록버스터들이 그저 영화적 허구만은 아니라는 것을 모두 안다. 그럼에도 재앙이 나의 세기는 아닐 것이라는 공허한 무지에만 기댄다.

공장식 대량축산은 ‘신종 감염병’이라는 미스터리 호러물의 ‘증폭기’로 지목되고 있고, 인공지능(AI) 등 기술의 무한질주는 실업과 절대적 감시사회의 황량함을 눈앞에 드러낸다. 자동차·전기로 변신한 화석에너지는 기후재난의 원인이자, ‘인류 멸종’의 에너지로 경고되고 있다. 대도시의 잘 구획된 밀집구조는 모든 외부 공격으로부터 인간의 방어체계를 극도로 취약하게 만들었다. 공기통로를 타고 삽시간에 빌딩을 점령할 수 있는 건 감염병만이 아니다. 기계의 편리에 움직임을 빼앗긴 인류는 새로운 질병들의 도전에 직면해 있다. 사망원인 1·2위인 심장병과 암은 1세기 전만 해도 저 뒷줄에 있었다.

코로나19 공포 속에서도 아직은 인간 용기의 희망을 본다. “그는 세상의 모든 이를 위하여 말을 했습니다(他爲蒼生說過話).” 당초 중국인 의사 리원량의 유서로 알려진 글 마지막 대목이다. 그는 코로나19의 위험성을 세상에 알렸다가 당국의 탄압을 받았고, 결국 이 질병으로 숨졌다. 비록 다른 이의 추모글로 밝혀졌지만, 묘비명과 같은 이 글 속에 그의 용기가 어떤 것인지 담겨 있다. 보다 많은 이들이 ‘세상의 모든 이들’을 위해 용기를 내길 바라는 남은 이들의 소망과 다짐이다.

국내에서도 코로나19 공포가 혐오와 차별로 치닫던 때 한 아산 시민의 ‘우한교민 환영합니다’라는 SNS는 혼돈의 흐름을 바꿨다. ‘우리가 아산이다’라는 용기는 사람들에게 부끄러움과 이성, 자신감을 일깨웠다. 리원량과 ‘아산’은 한 개인의 용기가 얼마나 큰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지를 증명한다. 그래서 인류는 전체이면서 개인이다. 

지금 이 행성은 인류에게 ‘용기’를 요구하고 있다. 리원량이나 아산처럼. 우리가 내야 할 용기는 그러지 못할 경우 각오해야 할 재앙에 비하면 훨씬 가볍다. 앞선 용기들이 감내했던 희생까지도 필요치 않다. 일상의 편리를 조금은 포기할 수 있겠다는 용기 정도이다. 코로나19에 맞선 인류가 ‘세상 모든 이들을 위해 말’하고 싶은 진실은 바로 그것일지 모른다. ‘불편을 감내할 용기가 있는가.’

<김광호 기획에디터 겸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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