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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은 무작정 국도 갓길을 걷기 시작했다.

새벽 1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가로등 하나 없는 국도는, 그러나 보름이 가까워진 달과 그 달빛을 한 몸에 받은 벚꽃 때문에 그렇게 어둡진 않았다. 이따금 바람이 한차례 불어올 때마다 어린 나비의 날개 같은 벚꽃이 살아 움직이듯 나뭇가지 사이를 날아다녔다.

 

 

“더러워서, 진짜….”

정용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며 혼잣말을 했다. 벚나무와 야산에 가려 물류창고는 보이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되돌아간다면….’ 걸어서 채 20분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정용의 마음이 약해진 건 그 거리 때문이었다. 잠깐 수치스럽고, 잠깐 고개를 숙이면, 일당도 제대로 받을 수 있을 것이고, 또 몇십 킬로미터를 걷지 않아도 될 것이다. 몇십 킬로미터라니, 그게 무슨 편의점에 새로 나온 과자 이름인가? 정용은 까닭 없이 자신이 버려진 아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달부터 정용은 일주일에 세 번, 광역시에서 버스로 3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물류창고에서 택배 상하차 알바를 시작했다. 주간과 야간 타임을 고를 수 있었는데, 정용은 오후 6시부터 시작해서 오전 6시에 끝나는 야간 근무를 선택했다. 시청 근처에 있는 정류장에 오후 5시쯤 서 있으면 용역 회사에서 마련한 전세버스가 도착했는데, 그 버스를 타고 출근했고, 다시 그 버스를 타고 퇴근했다. 그만큼 물류창고는 도심에서 한참 떨어진, 일반 버스 노선이 닿지 않는, 외진 야산 근처에 있었다. 알바생들 도망가지 못하게 하려고 그랬나 보지, 뭐. 정용과 달리 주간 타임에서 일하는 진만은 툭, 그렇게 말했다. 과연, 그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일은 고됐다. 하룻밤에 택배 상자 3000개를 트럭에 쌓는 일이었다. 일당은 8만원. 2주 연속 일을 나갔더니 그나마 허리 통증은 덜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아침 퇴근 버스를 타면 현기증이 일고 종아리가 쑤셔왔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정용은 다시 몸을 돌려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쨌든 길은 다 이어져 있는 거니까, 걷다 보면 언젠간 도착하겠지. 정용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정용은 물러설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제 아침, 정용은 일을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물류창고 담당 팀장에게 이의를 제기했다. 분명 계약한 시간은 오전 6시까지인데, 왜 7시까지 일을 시키느냐, 그렇게 일을 더 시킬 거라면 추가 수당을 줘야 하지 않느냐, 정용은 때가 잔뜩 묻은 목장갑을 사무실에 반납하면서 그렇게 말했다.

40대 초반쯤 보이는 담당 팀장은 컴퓨터 엑셀파일을 정리하다가 팔짱을 끼고 말했다.

“야, 뭐 우리가 대단한 일 시켰냐? 뭐 어려운 일 시켰어? 버스 오기 전에 잠깐 박스 좀 한쪽으로 정리해달라고 한 건데, 그게 뭐 그렇게 시간 따질 만큼 굉장한 일이라고…. 아, 진짜 요즘 애들은….”

정용은 담당 팀장의 말에 기분이 상했는데, 그건 말의 내용 때문이 아니라 말의 태도 때문이었다. 저 인간은 날 언제 봤다고 저렇게 반말을 해댈까? 정용은 지지 않고 더 따지고 싶었으나 버스 시간 때문에 그러질 못했다. 그리고 바로 오늘 자정 무렵 주어진 10분 휴식 시간에 정용은 다시 담당 팀장에게 따져 물었다. “시간을 따질 만큼 굉장한 일이라서가 아니고요, 정확히 하자는 거죠.”

“야, 마음에 안 들면 그만둬! 그만두면 되잖아. 너 아니어도 매일 일하겠다고 오는 애들 천지야. 아, 진짜 우리 땐 안 그랬는데, 요즘 애들 왜 이러지?”

정용은 그 말에 바로 끼고 있던 목장갑을 벗어 바닥에 던지고 물류창고 밖으로 걸어 나왔다.

정용은 후회하진 않았으나, 다리는 아팠다. 이대로 걸어가다 보면 모르긴 몰라도 아침 퇴근 버스보다 더 늦게 도착할 게 뻔해 보였다. 정용은 아름드리 벚나무 아래 서서 잠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벚꽃에 가려 밤하늘이 보이지 않았다. ‘이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벚꽃이 뭐 대단한 일을 한다고 4월마다 사람들은 난리를 칠까….’ 정용은 괜스레 나무 밑동을 발로 툭 걷어찼다. 꽃잎이 우수수, 아래로 떨어졌다. “좋겠다, 넌, 정리하지 않아도 돼서. 요즘 애도 아니라서….” 나무는 아무 말이 없었다.

정용이 한 시간 넘게 국도 갓길을 걸었을 때였다. 갑자기 등 뒤에서 헤드라이트 불빛이 다가왔다. 정용은 거의 반사적으로 차선 정중앙까지 뛰어나가 양팔을 흔들었다. 물류창고를 빠져나온 이후 처음으로 보는 차량 불빛이었다.     

저 차만 얻어 탈 수 있다면, 광역시 근처까지 갈 수만 있다면, 정용은 이 밤의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마치 추운 겨울날, 자신을 태우러 다가오는 택시를 만난 것처럼, 정용은 최선을 다해 크게 팔을 흔들었다.

하지만 그의 앞까지 다가온 차는 속도를 멈추지 않고 그대로 지나쳤다. 그를 피해 반대편 차선으로 넘어가면서까지도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정용은 두 손을 든 채 멀거니 멀어져가는 차의 트렁크를 바라보았다. 차가 지나간 자리에 벚꽃이 먼지처럼 일어났다가 다시 서서히 내려앉는 모습이 보였다.

그냥 그대로 지나칠 것 같았던 차는, 정용과 이삼십 미터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그러곤 시동도 끄지 않은 상태로 한 남자가 운전석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어두워서, 정용은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순 없었지만, 그가 고함처럼 내지르는 말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야, 이 새끼야, 미쳤어! 네가 멧돼지야! 깜짝 놀랐잖아! 하여간 요즘 새끼들은….”

남자는 그렇게 말하곤 다시 재빠르게 차 안으로 들어갔다. 차는 더 빠른 속도로 정용과 멀어졌다. 정용은 그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보고 서 있었다. 헤드라이트 불빛이 사라진 국도는, 좀 전보다 훨씬 더 컴컴해진 것 같았다. 벚꽃이 만개해 있어도, 벚꽃이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웠다. 그 어둠이 정용은 좀 무서웠다.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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