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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만은 생일날 어머니의 편지를 받았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진만이 보거라. 엄마다.

네 생일인데 전화만 달랑 하기 미안해서 몇 자 적어 보낸다. 네가 군 생활할 땐 그래도 엄마랑 종종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그땐 그게 그렇게 좋은 건지 잘 몰랐단다. 그 시절엔 엄마도 지금보단 젊었으니까.

타지에서 미역국이라도 제대로 끓여 먹었는지 모르겠구나. 엄마가 가서 챙겨주었으면 좋겠는데, 여기 식당일도 그렇고, 내 무릎도 그렇고, 도통 움직일 수 있는 처지가 못 되는구나. 무심한 엄마를 이해해주길 바란다.

사랑하는 내 아들 진만아.

네가 세상에 나온 지도 어느새 스물일곱 해가 지났구나. 엄마는 말랑말랑했던 네 손과 발을 씻기던 날들을 바로 어제처럼 떠올릴 수 있단다. 너는 태어날 때부터 다른 아이들에 비해 작고 병치레도 잦아서 엄마 속을 많이 애태우곤 했단다. 엄마 혼자 너를 둘러업고 병원을 뛰어갔던 적도 많았어. 펄펄 열이 나는 너를 안고서 병원 복도에 앉아 있는데, 그런데도 자꾸 까무룩 까무룩 졸음이 몰려와서, 너랑 같이 한 사흘 만이라도 병원에 입원해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한 적도 많았단다.

진만아, 너는 엄마 아빠가 이혼하고 따로 살아서 원망이 많겠지만, 엄마는 엄마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단다. 엄마가 예전에도 말했듯이, 너와 꼭 단둘이서만 살고 싶었어. 한데도 네 아빠 그 인간이 그건 안 된다고, 진만이는 장손이라서 죽어도 자기와 살아야 한다고 고집을 피우는 바람에… 내가 한시라도 그 인간하곤 따로 떨어져 살고 싶은 마음에 그렇게 된 거란다. 또 한편 마음속으로 그래도 나보단 잘 키우겠지, 저렇게 장손 장손 해대는데 모자람 없이 가르치겠지, 생각한 것도 사실이란다. 그 인간이 맨날 돈 벌어온답시고 전국 공사현장 떠돌면서 중학생이던 너를 방치하다시피 한 것을 떠올리면, 그때 내가 더 악을 써볼걸, 조금 더 용기를 내 볼걸, 후회가 되는구나. 그게 너한테도 참 많이 미안한 점이고….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말이지만 네 아빠 그 인간은 젊은 날에도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인간이었단다. 생활비라곤 단 한 번도 제대로 가져다준 적 없고, 너를 씻겨주거나 네 기저귀를 갈아준 적도 없었단다. 집에 들어오면 그저 자빠져 자거나 어떻게든 나갈 핑계를 만들어서 다시 술이나 퍼마시고 돌아왔지…. 그땐 혼자 된 네 할아버지도 우리가 같이 모시고 살았잖니? 그러니 그 인간이 더 미워지더라. 인간이 미워지니까 그 인간이 풍기는 냄새와 밥 먹는 소리, 하다못해 그 인간이 베고 잔 베개마저도 꼴 보기 싫어지더구나….

진만아, 네 생일 축하한다고 편지를 쓰면서 엄마가 또 괜한 소리를 하는 거 같구나. 엄마가 요새 식당일 끝나고 집에 들어오면 괜스레 외롭고 쓸쓸한 심정이 되어 공책에 이것저것 끄적거려 보는데, 쓰는 것들이 모두 다 지난날의 후회뿐이야. 그래서 그런 것이니 너무 괘념치 말거라. 네 생일은 너에게만 의미 있는 날은 아니란다. 그날은 엄마 인생이 바뀐 날이기도 하니, 엄마가 구질구질한 말을 써도 용서해주기 바란다.

다시 한번 생일 축하하고, 타지에서 몸 성히, 밥 굶지 말고 잘 지내길 바란다. 여자친구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결혼은 나중에 나중에 신중하게 생각해서 하도록 하렴. 네 아빠 그 인간처럼 할 생각이면 아예 하지 않는 것도 좋은 방법이고…. 요즘 세상에 네 아빠 그 인간처럼 여자한테 그러면 어떻게 되는지 너도 잘 알고 있지? 알아서 잘 처신하길 바란다.

진만은 어머니에게 편지를 받은 다음 날 바로 답장을 썼다.

엄마.

생일 축하해주셔서 고마워요. 오랜만에 엄마 글씨체를 보니까 저도 예전 군대 시절 생각이 나고, 그래서 좋았어요. 제가 군대 있을 때 제게 유일하게 답장을 보내준 사람이 엄마였으니까요.

생일이라고 별다르게 지낸 것은 아니었는데, 그래도 야간 알바 마치고 자취방에 돌아오니까 같이 사는 친구가 미역국을 끓여줘서 섭섭한 것은 없었어요. 여자친구는 아니고요, 같이 택배 상하차 알바하는 남자 동기예요. 저는 야간반, 그 친구는 오후반. 미역국은 편의점에서 파는 즉석식품이었는데, 오랜만에 먹어서 그런가 나쁘지 않았어요. 편의점에서 파는 건 그런 게 좋거든요. 뭐든 나쁘진 않은 거. 깜짝 놀랄 만한 맛은 없지만, 최소한 나쁘진 않은 거. 그러면 된 거지, 뭐.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엄마.

엄마 편지 읽고 나니까 저도 엄마 아빠 생각이 많이 났어요. 평소엔 하지 않았는데, 생일날 엄마 아빠 생각을 하니까 기분이 좀 묘하더라구요. 하지만 그것도 그렇게 나쁘진 않았어요. 전 정말 엄마나 아빠에게 원망이나 섭섭한 마음 같은 게 없거든요. 어디에서 읽은 적 있는데, 부모는 이해하는 게 아니라 용서하는 거래요. 한데, 저는 그 말도 잘 이해되지 않더라구요. 용서하면 그 뒤엔 어찌해야 하는가? 그러면 그다음에 서로 잘 지내야 하는가? 저는 이해도 싫고 용서도 싫어요. 그냥 지금처럼 나쁘지만 않으면 돼요. 저는 지금 그런 상태거든요. 엄마도 그렇게 되시길 바랄게요. 저에게도, 아빠에게도.

생일 축하해줘서 고마워요, 엄마. 그리고 제 여자친구나 결혼 문제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엄마 아빠 때는 그래도 결혼도 해보고 이혼도 해보고 그랬지만, 우리는… 아마 안 될 거예요. 하지만 그래서 엄마 걱정하는 나쁜 일도 생기지 않을 테니까, 그러면 된 거죠, 뭐.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엄마, 건강하시고요. 엄마도 나쁘지 않은 시간을 보내시길 바라요.

진만은 자신이 쓴 답장을 천천히 읽어보았다. 진만은 그 편지를 보내지 않았다.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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