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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자취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진만은 어제까지만 해도 눈에 띄지 않던 플래카드가 사거리 횡단보도 반대편 가로수에 묶여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 플래카드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사고 목격자를 찾습니다. 지난 1월16일 밤 12시쯤 이곳 횡단보도에서 일어난 1톤 트럭 사고를 목격한 분은 연락해주시기 바랍니다. 후사하겠습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체감온도가 영하 15를 넘는 밤이었다. 어깨를 잔뜩 옹송그린 채 가로수 옆을 지나쳤던 진만은, 무언가 생각난 듯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뭐야. 이거 날 찾는 플래카드잖아.’

진만은 다시 걸음을 돌려 플래카드 앞에 섰다. 맞네, 그날이 맞아. 진만은 자신이 건너온 횡단보도를 뒤돌아보았다.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고, 희끄무레 남아 있는 잔설 위로 차량들만 빠른 속도로 지나치고 있었다. 차도에서는 바람소리가 더 크게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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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 전, 진만은 퇴근길에 교통사고를 목격했다. 그때도 자정 가까운 시간이었고, 체감 온도는 자기가 무슨 PC방 최저 시급이나 되는 것처럼 며칠째 영하 15도 변함이 없었다. 허기가 져서, 진만은 계속 자취방 싱크대 찬장에 있는 짜장라면만 생각하면서 빠르게 걷고 있었다. 짜장라면 위에 ‘달걀 후라이’를 올려야지, 노른자는 터뜨리지 말아야지, 마음먹으면서 깜빡깜빡 초록불이 점멸하는 횡단보도를 건넜다. 반대편 인도에 도착해 채 몇 걸음 떼지 않았을 때, 날카로운 브레이크 소리를 들었다. 횡단보도 초록불은 이미 빨간불로 변해 있었고, 도로 2차선엔 짐칸에 파란색 방수포를 씌운 1톤 트럭 한 대가 멈춰 서 있었다. 그리고 트럭의 전조등 앞에 누워 있는 한 사람… 트럭 운전석에서 검은색 비니에 목장갑을 낀 남자가 뛰어나왔고, 진만 또한 자신도 모르게 천천히 그쪽으로 걸어갔다.

“괜찮으세요?”

검은 비니 아래로 희끗희끗 흰머리가 보이는 운전사가 물었다. 그는 보풀이 인 회색 스웨터 차림이었는데, 소매 끝에 다시 누런 내복 소매가 튀어나와 있었다. 도로에 누워 있는 사람은 보라색 털외투를 입은 할머니였다. 할머니가 쓰러져 있는 자리 옆에는 접이식 쇼핑카트가 모로 누워 있었다. 쇼핑카트에는 각종 박스들이 마치 부러진 날개처럼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에그… 다리가… 다리가 안 움직이는데….”

운전사는 할머니를 거의 뒤에서 안다시피 해서 부축했다. 진만은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접이식 쇼핑카트를 일으켜 세웠다.

“일단 병원부터 가시죠.”

운전사가 할머니를 트럭 조수석에 태웠다. 그 와중에도 할머니가 쇼핑카트를 찾아 진만이 대신 트럭 짐칸에 실어주었다. 그것이 그날 진만이 목격한 사고의 전부였다. 진만은 자신이 무언가 좋은 일을 한 것만 같아 마음이 뿌듯해졌지만, 자취방에 남아 있던 달걀을 정용이 몽땅 달걀찜으로 해놓은 것을 보고 이내 마음이 상했다. 그 마음이 사고의 잔상보다 훨씬 더 오래 남았다. 퍽퍽한 짜장라면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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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럭 운전사는 신호등 색깔부터 물었다. 자취방으로 돌아와 몇 분을 더 고민하다가 진만이 처음 전화를 했을 때였다.

“글쎄요… 아마 빨간색이었던 거 같기도 한데….”

진만이 말을 흐렸지만, 트럭 운전사는 대번에 그렇죠, 빨간색이 맞잖아요, 하면서 말을 이었다. 트럭 운전사의 말에 따르면 초록색이냐, 빨간색이냐에 따라 자신의 상황이 크게 달라진다고 했다. 초록색일 경우는 11대 중과실 교통사고로 형사처벌까지 받는 것이고, 반대로 빨간색일 경우 할머니의 무단횡단으로 자신의 과실은 줄어든다는 것이었다.

“저기, 경찰서에서 전화가 오면 그냥 본대로 말씀만 해주시면 되는 거예요.”

트럭 운전사는 목소리가 빨랐고, 또 다급해 보였다.

“할머니는요? 그때 그 할머니는 많이 다치셨어요?”

왼쪽 다리 골절로 8주. 현재 한방병원에 입원 중. 그것이 트럭 운전사가 전한 할머니의 근황이었다.

“꼭 좀 부탁합시다. CCTV도 없고 블랙박스도 없는데, 할머니는 계속 초록불에 건넜다고 우기시니….”

진만은 네, 네, 말끝을 흐리면서 전화를 끊었다.

“그래서? 진짜 증언하게?”

옆에 누워 있던 정용이 슬쩍 진만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야 하지 않을까? 내가 건너고 있을 때 초록불이 깜빡거렸던 게 사실이니까….”

“그 할머니가 안 됐네… 네가 그렇게 말하면 그 할머니가 힘들어질 텐데….”

진만은 팔베개를 한 채 자취방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러면 그냥 말까? 그 할머니 그 시간에 폐지 줍는 거 보면….”

“그럼 또 그 트럭 운전사가 힘들어지겠지. 중과실 사고면 벌금도 엄청 나올 텐데….”

“아이 씨,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진만은 시험을 망친 아이처럼 제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그러면서 트럭 운전사에게 전화를 건 자신을 잠깐 원망하기도 했다.

“증언해주기로 했으면 다른 거 말고 사실만 말해야지 뭐. 그게 어려운 거라서 진짜 증언할 거냐고 물은 건데….”

정용이 그렇게 말했지만, 진만은 말이 없었다. 대신 진만은 머릿속으로 그날 밤 사거리 횡단보도를 반복해서 떠올렸다. 초록불이 깜빡거릴 때, 목을 잔뜩 움츠린 채 횡단보도를 건너던 자신의 등 뒤로 탈탈탈, 접이식 쇼핑카트 바퀴가 내던 소리… 슬쩍 뒤돌아보면서 아이고 할머니, 발이 많이 느리시네… 생각하면서도 뒤돌아 다가가지 못했던 자신의 마음… 진만은 어쩐지 자신의 그 마음까지 증언해야 할까 봐, 그게 더 두려워서 밤늦도록 쉬이 잠들지 못했다. 추운 겨울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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