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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은 대학교 2년 선배인 철민의 전화를 받았다.

“너, 송 교수님 알지? 송 교수님이 이번에 정년퇴임하시잖니.”

철민 선배의 말인즉슨, 학과 동문회에서 송 교수의 정년퇴임식을 광역시에 있는 한 호텔 연회장에서 열기로 했는데, 시간 괜찮으면 꼭 참석하라는 것이었다.

“제가요? 제가 그런 자리에 왜….”

정용은 말꼬리를 흐렸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자기 뜻을 전했다고 생각했다. 원래 그런 자리는 성공한 제자들이나 참석하는 행사가 아니던가. 화환도 보내고, 꽃다발도 들고 가고, 지인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처럼 봉투에 돈도 넣고…. 직업이라곤 택배 상하차 알바와 편의점 알바를 전전하고 있는 처지인데…사촌여동생 결혼식도 부조금이 없어서 못 갔는데….

“그냥 머릿수만 채우면 되는 거야. 그런 행사는 다른 거 다 필요 없고 제자들 몇 명 왔나, 그게 제일 중요하거든. 경비는 다 채워졌으니까 넌 그냥 와서 밥만 먹고 가면 되는 거야.”

철민 선배는 학과 내 소모임 회장을 2년 연속 맡으면서도 평점 4.0 아래로 한 번도 내려간 적 없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는 졸업하던 그해, 학과 교수 추천을 받아 지역인재전형으로 공기업에 입사해 지금까지 그곳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 추천서를 써준 사람이 바로 송 교수였다. 정용은 철민에게 노력해볼게요, 말하곤 전화를 끊었다. 송 교수보다도, 철민을 보는 게 어쩐지 정용에겐 더 자신 없는 일이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학부 시절, 송 교수에 대한 추억은 별다른 게 없었다. 송 교수는 허리가 좋지 않아 늘 왼쪽 허리를 한 손으로 짚은 채 강의를 하곤 했는데, 그러면서도 강의 시간을 꽉꽉 채우는 것으로 유명했다. 휴강도 없었고, 중간고사 기간이나 축제 기간이라고 어물쩍 넘어가는 법도 없었다. 그렇다고 학생들과 무람없이 지냈는가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송 교수는 학술답사나 엠티 같은 학과 행사에도 빠짐없이 참석했지만, 학생들과 둘러앉아 술자리를 함께하진 않았다. 늘 밤 9시만 되면 소리 없이 숙소로 사라지곤 했다. 세상에, 엠티에 양복 입고 오는 교수님은 전 세계적으로 저분밖에 없을 거야. 그게 바로 송 교수였다.

“그래서? 갈 거야?”

진만이 정용에게 물었다.

“뭐 일도 없고…가서 밥이나 얻어먹고 오지, 뭐.”

정용은 무덤덤하게 말했다. 그런 자리 가는 제자가 따로 있고, 갈 수 없는 제자가 따로 있나? 오기 같은 게 생기기도 했다.

“그럼, 나도 같이 갈까?”

“넌 송 교수님한테 배우지도 않았잖아?”

“과는 달라도…뭐 어쨌든 동문이니까….”

정용은 갑자기 가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다.

 

퇴임식은 오후 5시부터 시작되었다. 호텔은 정용이 생각한 것보다 크지 않았고, 연회장도 일반 식당 정도로 작았다. 정용은 연회장 앞에 코르사주를 단 채 서 있는 송 교수를 보고 얼떨결에 고개를 숙였다. 양복을 입고 있는 송 교수는 불과 2년 만에 다시 보는 것이었지만, 마치 오래전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을 만난 것처럼 낯설어 보였다.

“어어, 그래. 자네들도 왔는가?”

송 교수는 악수를 청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교수님, 새 출발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진만이 허리를 숙인 채 말했다. 정용은 그 옆에서 말없이 서 있기만 했다. 송 교수는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게 분명해 보였다.

퇴임식은 동료 교수와 제자 대표의 축사, 그리고 송 교수의 퇴임 강연으로 진행되었다.

“이거 봐라, 이거. 마지막까지 강의하신단다.”

연회장 같은 테이블에 앉은 철민 선배가 프린트된 유인물을 나눠주며 말했다. 유인물 맨 위에는 ‘한국 현대사의 쟁점들’이라는 제목이 붙어있었다. 진만은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TV프로그램 ‘짤방’을 소리 죽여 보았다. 정용은 송 교수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연회장에 온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구두를 신지 않은 사람은 자신과 진만뿐인 것 같았다. 그들은 모두 진지하게 송 교수의 강연을 듣고 있었다. 그래, 사는 게 팍팍하지 않으면 한국 현대사의 쟁점들이 궁금하기도 하겠지. 최저임금이니 고용상황이니 하는 것들보다, 한국 현대사의 쟁점들도 만만치 않게 중요한 거겠지. 정용의 마음은 점점 더 뾰족하게 변해갔다. 정용은 이 자리에 온 것을 후회했다.

 

식사는 뷔페식이었다. 정용은 음식을 한 번 갖다 먹고 난 후, 연회장 밖 주차장으로 나가 담배를 한 대 피웠다. 연회장 쪽에서 누군가 천천히 걸어오는 것 같아서 자세히 보니, 송 교수였다. 정용은 황급히 담배를 감췄다.

“같이 한 대 피우세.”

송 교수는 정용의 옆에 섰다.

“정용군, 박정용군 맞지? 4학년 때 내 강의 C학점 받은….”

정용은 말없이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송 교수가 자신의 이름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을 줄 몰랐다.

“한심하지, 이런 자리?”

“네? 아니, 저는 저기….”

송 교수는 한 손으로 계속 허리를 짚고 있었다.

“나이 들면 이런 자리 아니면 젊은 사람들을 잘 못 만나.”

정용은 고개를 돌려 담배 연기를 조심스럽게 내뱉었다.

“내가 죽기 전에 자네들 얼굴을 다시 볼 수 있겠나? 그 생각하면서 오래 말했네.”

연회장 쪽에서 왁자지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가 마이크를 잡은 모양이었다.

“정용군.”

“네, 선생님.”

“와줘서 고맙네. 늙은이들 말 귀담아듣지 말고, 우리 서로 얼굴만 기억함세.”

정용은 계속 자신의 운동화만 내려다본 채 서 있었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이기용 소설가·광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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