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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복 무렵, 진만은 남들은 다 먹는 삼계탕은 먹지 못하고, 그 대신 더위를 먹고 말았다.

몇 달 전에도 한 번 해봤던 물류창고 야간 상하차 알바를 닷새째 했을 때였다. 저녁 출근 준비를 위해 샤워를 하는데 이상하게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머리도 무겁고, 어지럽기까지 했다. 어, 뭐지? 진만은 샤워기를 든 채 가만히 변기 위에 앉았다. 현기증도, 무력감도, 나아지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그럴 만도 했다. 진만이 물류창고에서 일하는 시간은 밤 9시부터 오전 9시까지였다. 지역에 따라 분류된 박스를 트럭에 쌓는 일이었는데, 예전에 한 번 해봐서 그런지 사흘 정도 하니까 몸이 그렇게까지 힘들진 않았다. 이런 더위에, 대낮에 일하는 것보단 훨씬 낫지. 밤에도 이렇게 더운데… 진만은 쉬는 시간마다 함께 일하는 알바생들과 그런 이야기를 했다. ‘제가 아는 어떤 형은요, 아파트 공사장에서 일하는데요, 거긴 노가다 십장 아저씨가 삼십 분마다 호스로 물을 뿌려준대요’ ‘어디에? 건물에?’ ‘아니요, 인부들한테요’ ‘인부들이 무슨 젖소냐?’ ‘근데 그 형은 그게 너무 고맙대요. 그거 아니면 쓰러진다고…’ 그래, 그런 경우도 있을 수 있겠지. 그러니 이런 야밤에 알바를 할 수 있다는 건 또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진만은 그렇게 생각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대낮이었다. 잠을 자야 하는데… 도통 숙면을 취할 수가 없었다. 진만의 원룸은 친구 정용과 함께 사는 반지하의 월세방이었다. 대낮에도 해가 들지 않아 겨울엔 몹시 추웠다. 그러니 반대로 여름엔 시원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겨울엔 없던 습기만 더 더해진 꼴이었다.

더운 건 마찬가지인데 습기가 사라지지 않으니, 매일 무슨 적도 부근 정글에 장판 하나 깔고 잠을 자는 것만 같았다. 몸을 이리저리 뒤척일 때마다 쩍쩍, 장판과 팔꿈치, 장판과 종아리가 접착제처럼 서로 헤어지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먹는 것보다 자는 게 더 중요한데… 진만은 자다 깰 때마다 찬물로 샤워를 하고 다시 누웠지만, 늘 그때뿐이었다. 더위는 무심하게도 반지하 월세방에도 공평하게 찾아왔고, 진만은 늘 피곤한 상태 그대로 다시 물류창고로 나가야만 했다. 그러니, 몸에 이상이 온 것 역시 당연한 일이었다.

진만은 욕실에서 나와 팬티만 입은 차림으로 방바닥에 누웠다. 팀장에게 몸이 좀 안 좋아서 오늘 못 나갈 것 같다고 문자를 보내니, 바로 이런 답이 돌아왔다. ‘그래, 아프면 쉬어야지. 그래, 너 대신 다른 알바생들이 박스 3000개만 더 쌓으면 되니까, 괜찮아. 아프면 쉬어야지, 계속.’ 진만은 그 문자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자려고 노력했다. 몸에 힘이 없는 것은 여전했고, 현기증은 서서히 두통으로 바뀌고 있었다. 뭐 좀 시원하게 잘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한 댓 시간만 깨지 않고 쭉 잘 수만 있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진만은 허리를 일으켜 원룸 안을 둘러보았다. 죽부인 같은 거, 안고 자면 시원한 거… 원룸 안에는 짐이 거의 없어서, 죽부인 대용으로 쓸 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진만은 무릎걸음으로 붙박이장 앞으로 다가갔다. 거기에는 비어 있는 컴퓨터 박스가 하나 있었다. 진만과 정용은 거기에 양말을 넣어두곤 했다. 컴퓨터 박스의 재질은 종이였지만, 비닐 코팅이 되어 있어서 표면은 그런대로 차가웠다. 진만은 양말을 모두 비우고 컴퓨터 박스를 방 한가운데로 가져왔다. 그런 다음, 누운 상태 그대로 배와 가슴 위에 컴퓨터 박스를 올려놓았다. 시원했다. 약간, 서늘한 느낌마저 일 정도로 컴퓨터 박스는 차가웠다. 무게감도 거의 느껴지지 않아서, 마치 얇은 대나무 합판을 맨살 위에 올려놓은 것만 같았다. 진만은 두 눈을 감은 채 양팔로 가슴 위에 있는 컴퓨터 박스를 끌어안았다. 훨씬 더 기분이 나아졌다. 두통도 조금 가시는 것 같았다. 진만은 그 상태로 잠이 들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채 30분도 지나지 않아, 진만은 무언가 자신을 짓누르는 느낌이 들어 슬쩍 두 눈을 뜨고 말았다. 컴퓨터 박스를 안고 있는 자세 그대로였지만, 어쩐 일인지 무게감이 달랐다. 이게 왜 이러지? 진만은 몸을 조금 버둥거려 보았지만, 꿈쩍도 할 수 없었다. 심지어 컴퓨터 박스를 끌어안고 있는 양팔도 풀 수가 없었다. 가위구나! 이게 말로만 듣던 가위눌림이구나! 진만이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컴퓨터 박스에서 누군가의 머리가 스윽,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처음 보는 낯선 할아버지의 머리였다.

진만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곤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주여… 진만은 초등학교 이후 교회를 다녀본 적 없지만, 대뜸 그 말부터 먼저 나왔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가위눌림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라고 올라온 글을 본 적이 있었다. 그 사람은 기도를 하니까 바로 가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썼다. 주여…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모두 주님에게 오라 하셨지 않나요… 주여, 제게서 이 무거운 컴퓨터 박스를 거두어 주소서… 그래서 저 누군지도 알 수 없는 할아버님을 당신 곁으로 데리고 가소서… 진만은 한참을 속으로 기도한 후 다시 슬쩍 눈을 떠보았다. 하지만 박스는 그대로였다. 할아버지는 박스 위로 삐죽 이마와 눈만 나온 상태로 진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할아버지는 호스를 들고 있었다. 아아, 노가다 십장이었구나, 노가다 십장 할아버지였어!   

정용은 퇴근 후, 방으로 들어오면서 진만이 팬티만 입은 채로 컴퓨터 박스를 배 위에다 올려놓고 버둥거리는 모습을 보았다. 저건 또 뭐 하는 짓일까? 정용은 그 자리에 서서 가만히 진만을 바라보기만 했다. 진만은 웅얼웅얼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주여, 제가 젖솝니까? 제가 젖소는 아니지 않습니까?”

정용은 다시 원룸 밖으로 나가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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