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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올 것이 오고 말았구나. 정용은 원룸 주인과 통화를 마치자마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긴 오래 버티기도 버텼지. 다음달 계약 만료를 앞두고 받은 전화였다. 그동안 정용과 진만은 보증금 없이 월세 30만원만 내고 원룸에 거주했다. 그 세월이 삼 년이었다. 반지하였고, 지하철역까지 걸어서 20분 가까이 걸리는 집이었지만, 정용과 진만은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욕실 샤워기 수압도 문제없었고, 도시가스도 아무 이상 없었으니까. 그러면 됐다. 삼 년 동안 월세 한 번 올리지 않는 집주인을 만나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월세는 그대로 두고 새로 보증금만 500만원을 더 받겠다고 했다. 집주인은 그러면서 정말 미안해했는데, 하나뿐인 아들이 갑자기 정리해고를 당해 어떻게 치킨집이라도 차려주고 싶어서 그러는 거라는 말을 덧붙였다. 정용은 네, 네, 그러셔야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잠깐 얼굴도 모르는 집주인 아들을 걱정하기도 했다.

처음부터 정용은 이사할 마음 같은 건 먹지 않았다. 수도권이 아닌 지방 광역시였지만 이 정도 크기의 원룸을 이만한 보증금으로 얻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게 어려우면 다시 고시원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정용은 그건 싫었다. 생판 모르는 사람들과 공용 욕실을 쓰고, 공용 냉장고를 사용하는 것도 싫었다. 무엇보다 매달 나가는 돈이 컸다. 어쨌든 고시원은 방 하나에 둘이 같이 살 순 없는 일이니까.

“500만원이나? 갑자기?”

진만에게 말하자 그런 반응이 돌아왔다. 그동안 정용과 진만은 반반씩 월세를 부담했다. 하지만 진만이 일을 하지 못하고 쉴 때가 종종 있어서 정용이 22만원을 낼 때도, 18만원을 낼 때도 있었다. 그렇게 더 낸 돈이 50만원도 넘었다. 정용은 그 금액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뭐 어떻게 마련해 봐야지. 250만원씩 부담하면 되는 거 아니야?”

하지만 정용은 지금 진만의 수중에 25만원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남들은 몇억원씩 되는 아파트를 영혼까지 끌어 마련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진만의 영혼은 과연 어떤 영혼인가? 무슨 다이소 같은 영혼인가? 다이소에서 파는 5000원짜리 지갑에 깃든 영혼인가?

그 다음날부터 정용은 핸드폰을 들고 누군가와 통화하는 진만의 모습을 종종 목격했다. “그럼, 그럼. 이게 보증금이어서…. 글쎄 그렇다니까 딱 묶여 있는 돈이라니까…. 그래? 그럼 어떻게 한 50만원이라도 안 될까? 30만원도 괜찮고.”

진만은 여러 명에게 돈을 나눠 빌릴 작정인 듯했다. 그렇게 친하지 않았던 대학 동기한테도 전화했고, 예전 함께 알바했던 형에게도 연락했다. 심지어 그는 이제 대학교 2학년인 사촌 동생한테까지 전화했는데, 그래도 그 동생이 가장 빨리 10만원을 보내주었다.

정용은 그 모습을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정용의 통장에는 500만원이 조금 넘는 돈이 들어 있었다. 그가 매달 15만원씩 삼 년 가까이 모은 돈이었다. 어디 달아나지도 않는 돈이었으니까, 그냥 정용이 다 내도 됐지만, 그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정말 진만 대신 내준 50만원도 못 받을 것만 같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 생각을 하니까 정용은 자신의 영혼도 딱 그만한 크기가 돼버린 듯했다.

“아버지한테 부탁해보지 그래?”

정용은 불을 끄고 누워 있다가 조용히 진만에게 말을 걸어 보았다. 진만은 그날도 눕기 직전까지 누군가에게 계속 문자를 보냈다.

“그게 좀…. 아버지도 어려운데….”

진만의 아버지는 아파트 경비원이었다. 그 일을 해서 버는 돈으로 할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다고 들었다.

정용이 아무 말 없이 벽 쪽으로 모로 눕자, 진만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예전에, 내가 중학생일 때, 우리 아버지가 처음 연립주택을 마련해서 들어갔거든. 그때 이삿짐이 들어가기 전에 아버지가 연립주택 시멘트 바닥에 넙죽 절하고 막걸리도 뿌리더라구… 그때 난 그게 그렇게 이상해 보였는데… 요즘엔, 이야 그래도 우리 아버진 집에 절도 해봤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

진만의 말은 거기서 끝났다. 정용은 어둠 속에서 가만히 벽을 보고 누워 있었다.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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