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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정용은 어느 밤 이런 꿈을 꾸었다.

밤안개 자욱한 국도를 걷고 있을 때였다. 버드나무가 띄엄띄엄 마치 커다란 물음표처럼 늘어서 있는 국도였다. 저녁 내내 비가 왔는지 아스팔트는 검게 젖어 있었고, 차는 한 대도 지나다니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노란색 중앙선은 더 단호해 보였다. 한참을 걷다 보니, 저 앞에 감청 후드티를 입은 남자 한 명이 천천히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깨를 잔뜩 옹송그린 채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넣은 모습. 정용은 뒷모습만으로도 그것이 진만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저러니, 내가 잔소리를 안 할 수 있나. 정용은 잰걸음으로 진만을 따라잡았다. 숨은 하나도 차지 않았다. 어깨로 툭, 진만의 상체를 쳤다. 뭐야? 또 알바 잘린 거야? 정용이 물었지만 진만은 말없이 씨익 웃기만 했다. 며칠 면도를 하지 않은 듯 턱엔 거무튀튀한 수염이 나 있었지만, 이마와 뺨은 잡티 하나 없이 말끔했다. 둘은 함께 국도를 걸었다. 버스정류장이나 전봇대의 모습은 나오지 않았다. 좌측으로 야산을 낀 완만한 곡선 도로를 걸을 때였다. 저길 좀 봐. 진만이 턱으로 반대차선 가장자리를 가리켰다. 거기에는 작은 새끼 고라니 한 마리가 모로 누운 채 고개만 들어 이쪽을 살피고 있었다. 고라니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뒷다리가 말을 듣지 않는 눈치였다. 차에 치인 듯 비에 젖은 국도에 검은 얼룩이 선명히 보였다. 어쩌지? 정용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진만은 가만히 고라니를 노려보았다. 겁에 질린 눈빛. 어쩌긴, 뭘.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있나. 진만은 그렇게 말한 후 다시 걷기 시작했다. 정용은 그런 진만과 고라니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터벅터벅 다시 국도를 걸었다. 한참을 그렇게 걷고 있을 때 진만이 정용을 뒤돌아보며 짧게 말했다. 우리는 다 거지새끼들이야. 꿈은 거기에서 끝났다.

또 다른 밤엔 이런 꿈도 꾸었다.

이번엔 환한 대낮이었다. 낯선 공장이었는데, 진만과 정용은 하얀 와이셔츠에 조끼까지 입고 있었다. 상황을 파악해보니 출장 뷔페 알바 중이었다. 공장 사람들은 작업복을 입은 채 둘씩 셋씩 모여 음식을 먹고 있었다. 진만과 정용은 낑낑거리며 죽이 담긴 들통을 나르기도 했고, 초밥이 가득 담긴 접시를 옮기기도 했다. 한참을 그러고 있을 때 누군가 앞에서 큰소리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 같이 먹읍시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장 사람들이 진만과 정용의 손을 잡고 음식 앞으로 이끌었다. 정용은 주춤했지만, 진만은 이내 사람들과 어울려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무슨 말을 할 때마다 진만은 웃었고, 사람들도 함께 웃었다. 정용도 그 웃음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어느새 공장의 천장도 사라지고 파란 하늘이 보였다. 딱딱한 시멘트 바닥도 온데간데 보이지 않고 대신 잔디가 깔렸다. 그 안에서 진만은 누구보다 행복해 보였다. 누구보다 크게 웃었다. 한참 동안 그 모습을 보던 정용도 소리 내지 않고 따라 웃었다. 꿈은 거기에서 끝났다.

그 꿈에서 깨자마자 정용은 한동안 침대에 엎드려 울었다. 진만의 장례식 사흘 뒤의 일이었다. 어찌 보면 그건 장례식이라고 하기도 어려웠다.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고, 그 흔한 근조화환 하나 없었다. 일정도 뒤죽박죽이어서 염을 하자마자 바로 화장장으로 이동했다. 정용은 그 기간 내내 진만의 곁을 지켰다. 진만이 죽었다는 것, 치킨집 알바를 하다가 국도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것, 차가운 길에 오랫동안 홀로 누워 있었다는 것. 그 모든 것이 도무지 실감 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장례식 내내 정용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진만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을 처음 봤는데, 정용은 제대로 인사도 하지 않았다. 까닭 모를 적의만 입 근처에서 맴돌았을 뿐이었다. 그렇게 사라졌다고 믿었던 눈물이 기껏 꿈 하나에 터져 나온 것이었다. 정용은 출근도 하지 않은 채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오랫동안 엎드려만 있었다. 그리고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최종민. 진만과 함께 치킨집에서 일했던 알바생. 정용이 계속 전화와 문자를 했지만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았던 남자. 그가 처음 전화를 걸어온 것이었다. 정용은 두 손으로 얼굴을 몇 번 쓸어내린 후,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작고 여린, 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목소리가 저편에서 들려왔다.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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