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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쯤 열린 철제 정문에 ‘출입금지, 휴교’라고 쓰여 있었다. 미리 알고 갔지만 텅 빈 운동장을 마주하니 실감이 났다. 학교 안으로 들어서자 운동장 주변으로 승용차들이 빼곡했다. 인근 아파트 공사장 관계자들이 세워놓은 것 같았다. 학교 울타리 너머 5층 아파트보다 훨씬 높게 자란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하늘이 맑아서 나무들의 실루엣이 한층 선명하고 늠름해 보였다.

지난 9월2일 토요일 오후, 서울 강남구 개포동 개포주공 1단지 앞 개포중학교. 일군의 작가들이 텅 빈 학교 교실 한 칸을 빌려 ‘재난학교’를 세우고 포럼을 열었다. 나를 토론자의 한 사람으로 불러서 찾아가는 길이었다. 문을 닫은 학교 중앙 현관에 교훈이 그대로 붙어 있었다. 의자 하나 남아 있지 않은 교실 천장에는 영어로 쓴 표어가 덩그러니 매달려 있었다. 폐교 분위기가 물씬했다.

포럼은 2층 3학년 4반 교실에서 열렸다. 이날 사실상 폐교에서 개교한 학교 이름은 ‘재美난학교’다. 아름다울 미(美)자에 학교 설립 정신이 담겼다. 재난학교는 최근 이슈로 떠올라 있는 젠트리피케이션을 포함해 시민이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는 모든 사회적 갈등 상황에 개입하고자 한다. 예술가가 재난 현장에 스튜디오를 설치하고 피해자와 시민의 각성과 연대를 도모한다.

기획자 최소연씨(테이크아웃드로잉 대표)는 “재난은 문화와 예술만이 넘어설 수 있다. 재난 사이에서 아름다움을 읽어낼 수 있다면 재美난 학교가 되어간다”고 말한다. 재난포럼은 이번이 세 번째다. 두 번째는 지난 6월 서울 용산구 한남동 꽃집에서 열렸다. 주인의 무리한 요구에 쫓겨날 처지에 놓인 꽃집에서 열띤 토론을 벌였다. 최씨는 “재난을 스마트폰으로 ‘소비’하는 시대”라며 재난 현장에 직접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스마트폰으로 접하는 영상과 시민의 권리가 침해당하는 현장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접속은 결속이 아니다. 검색이 사색이 아니듯.

개포동은 재건축이 한창이다. 2·3단지에는 타워크레인이 서 있고 1·4단지에는 아직 주민들이 산다. 텅 빈 교실에 스튜디오를 차린 이성민 작가는 개포동에서 자란 원주민이다. 3년 전 귀향했을 때 그는 자신의 기억이 흔적과 만날 수 없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때부터 혼자 아직 남아 있는 것들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는 개포주공아파트 1단지(5040가구)에 살았거나 살고 있는 사람은 물론, 누구도 눈길을 주지 않아온 ‘살아 있는’ 나무 1만그루에 주목했다.

주민들이 떠나면 30년 넘은 거목들 대부분이 잘려나간다. 사람들의 추억 곳곳에 박혀 있을 1만그루 나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재건축 관계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도시학자들의 안중에도 나무는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성민 작가는 “우리는 상실에 얼마나 익숙해져 있는가”라며 온라인상에서 ‘개포동 나무 산책 프로젝트’를 전개했다. 이상한 애도였다. 아직 살아 있는 생명에 대한 애도. 이 작가는 “경제 논리로는 답이 안 나올 것”이라며 “작은 질문을 던졌을 뿐”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작은 질문이 아니다. 저 질문은 발견이고 경고이며 새로운 시작이다.

발제에 나선 젠트리피케이션 전문가 신현방 교수(런던정경대 지리환경학과)는 우연찮게도 개포중학교 1회 졸업생이었다. 신 교수는 자신도 고향을 상실한 재난 당사자라며 “재건축은 개발 이익을 최대화하는 것으로 못 가진 자를 물리적이고 직접적으로 배제하고 축출하는 구도로 진행된다”고 말했다. 신 교수는 연구자로서 그간 ‘피해자 인간’에만 관심을 가졌다면서 앞으로 나무와 같은 다른 생명도 연구에 포함하겠다고 다짐했다.

숲 해설가이자 <서울 사는 나무>의 저자 장세이씨는 “나무는 목재가 아니라 엄연한 생명”이라고 말했다. 장씨는 서울의 가로수를 볼 때마다 가로수들이 ‘차라리 죽여달라’고 외치는 것 같다면서 다른 생명들에 겸손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장씨는 ‘나무는 우러르고 풀은 무릎 꿇고 보라’는 경구를 소개한 다음, 주민과 나무를 기억할 수 있는 기념공원을 조성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이어 황지훈씨 등 개포동에서 10~30년 거주한 주민들이 ‘장소 상실’에 대한 소회를 나눴다.

나는 토론에서 타자의 처지를 생각하지 못하는 상태가 곧 ‘마음의 재난’이라고 말했다. 세계 최고의 자살률이 말해주듯 도시적 삶 자체, 아니 우리 몸, 우리 내면이 심각한 재난 현장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지금과 다른 미래를 꿈꿀 수 없다면 우리 모두가 디아스포라(Diaspora)라고 말했다. 그리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정한 시인이라면 누구보다 먼저 잘려나가는 나무를 아파했어야 하는데, 그간 나는 개발 현장의 나무들에 대해 무심했던 것이다. 정든 장소, 즉 추억을 박탈당하는 것이 얼마나 큰 상처인지에 대해 소홀했던 것이다. 나는 부끄럽고 미안하다고 말했다.

한편으론 고마웠다. 그간 내가 시의 마음으로부터 얼마나 멀어져 있었는지를 재난학교가 환기시켜줬기 때문이다. 재난학교에서 나는 토론자가 아니고 학생이었다. 포럼을 마치고 참가자들은 나무가 우거진 아파트 단지를 걸었다. 나는 오래된 등나무 앞에서 이런 문장을 떠올렸다. ‘나무가 말을 하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말을 걸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을 걸기로 했다. 내 앞에 있는 사람에게, 생명에게. 물론 정치와 미래에게도.

<이문재 | 시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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