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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주변에 카페만 늘고 있는 것 같다.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 주변 반경 5분 거리에 커피 파는 집만 10여개다. 커피에 푹 빠져 있는 애호가들도 많다. 이탈리아에서 만들었다는 모카포트를 사서 에스프레소를 마신다는 사람도 있고, 수십만~수백만원짜리 커피머신을 들여놓겠다는 사람도 있다. 또 직접 생두를 사서 로스팅을 해보겠다는 사람도 있다. 대학에는 바리스타학과들이 생겼고, 바리스타 대회도 열린다. 커피는 확실히 떴다. 한데 차는 왜?

중국, 일본, 한국 등 동아시아 삼국은 ‘커피의 나라’라기보다는 ‘차의 나라’다. <삼국지>에도 효심 깊은 유비가 어머니를 위해 대대로 내려오는 보검의 보석을 팔아 차를 샀다는 얘기가 나온다. 불가에서는 부처에게 차를 바치는 천수백년을 이어온 헌공다례가 있다. 명절 차례도 다례에서 유래했다는 얘기가 있다. 물론 커피를 마신다고 차를 안 마시는 건 아니다. 하지만 동아시아 삼국 중 유독 한국의 차 문화가 많이 쇠락했다. 중국인 관광객들 중엔 차 텀블러를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고, 일본여행을 가보면 호텔이나 여관에 빠짐없이 차와 찻물이 든 보온병이 놓여 있다.

(출처:경향신문DB)

차 역시 산업 규모나 무역의 영향을 받는다. 서유럽에서 드물게 커피보다는 차를 많이 마시는 영국도 원래 커피의 나라였다고 한다. 하인리히 E 야콥은 <커피의 역사>에서 1680년에서 1730년까지 반세기 동안 런던은 전 세계 어느 도시보다 커피를 많이 소비했으며, 차는 그 이후에 도입됐다고 썼다. 식민지였던 실론 지방 커피나무에 전염병이 돌았고, 주민들이 커피나무를 베고 차나무를 심으면서 영국은 차의 나라가 됐던 것이다.

전문가들은 차가 지금보다 더 생활 속으로 파고들려면 생산량이 많아야 한다고 말한다. 생산량이 많으면 품질 평가도 쉬워진다. 하지만 녹차는 농업생산액의 0.1%에 불과하다. 1990년대 중반 하동으로 취재를 갔을 때였다. 가마솥에 덖고, 옛 문헌대로 아홉 번 볶고 말리는 구증구포 방식으로 차를 만든다는 다인들도 있었다. 가격은 천차만별. 어떤 이는 한 통에 3만원, 어떤 이는 한 통에 50만원을 받는다고 했다. 좋은 차의 기준이란 것도 향, 맛 등 단계별 규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생산시기가 곡우 이전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정도였다. 2007년 농약 파동으로 그나마 불던 차 바람마저 사라져버린 듯하다. 반면 유럽이나 대만 등 수입 차 프랜차이즈는 늘고 있다.

역사·문화적 영향이 더 클지도 모르겠다. 차는 역사적으로 기호품이라기보다는 공양, 예법, 수행과 연관돼 있다. 신라 때 들어온 차는 주로 상류층이 즐겨 마셨다. 그러다 조선시대 들어 억불숭유 정책으로 차도 홀대받았다. 임진왜란 이후 차는 더욱 뜸해졌고, 불가를 통해 맥이 이어져왔다. 19세기 차 문화가 부활했는데, <동다선> 등을 지은 초의선사는 차와 선은 같다는 ‘다선일여’를 설파했다. 품질 좋은 차를 만드는 것보다 차를 달여 마시는 과정 자체를 불교의 수련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하여 한복 차림으로 의관 정제하고, 다구를 데우고, 찻물을 내리는 과정이 고지식하고 답답해 보일지 모르지만 차가 곧 도(道)라는 행위(다도)라고 보면 충분히 이해가 간다. 커피가 기호산업으로 융성했다면, 차는 정신문화에 뿌리를 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소비사회다. 소비사회에서는 본질보다는 스타일, 기능 이상으로 디자인을 높이 친다. 유럽도 마찬가지였다. 중세 때만 해도 제작자의 이름과 독창성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품질 좋은 제품만 만들면 됐다. 산업혁명 후 길드제가 무너진 뒤 마스터로부터 도제들이 독립한 뒤 자신의 제품을 홍보해야 했다. 그러려면 남들과 다르게 만들어야 했다. 이후 품질만큼이나 중요해진 것은 디자인이 됐고, 디자인이 스타일을 만들었다.

차의 아름다운 전통을 타박할 이유는 없다. 유행에 휩쓸리는 시대에 정좌하고 차 한 잔 달여 마시는 것은 좋다. 마찬가지로 눈곱도 떼지 않고 텀블러에 찻잎을 넣고 우려내 마셔도 상관없다. 다인들을 만나면 중국의 발효차와 비교해서 우리 덖음차의 전통을 강조하는데, 굳이 덖음차만 고집할 필요도 없다. 미세한 가루차로 거품을 내어 마시는 말차도 상관없다. 커피처럼 차도 좀 다양해져야 한다. 호기심 많은 현대인들에게 말차는 맛도 좀 달라서 에스프레소 같은 느낌일 수 있다. 세계녹차무역량은 2023년까지 연 6.1%씩 성장할 것이라고 한다. 7~8년 전까지만 해도 봄이면 해차를 사서 일년 내내 우려 마시곤 했다. 올봄, 트렌디한 차 텀블러나 세련된 다구를 하나 사서 다시 차를 시작해볼까. 커피만큼 차도 향미가 있다.

<최병준 문화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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