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사회자가 서쪽 언덕을 보라고 했다. 붉게 물드는가 싶더니 코발트빛을 머금은 저녁 하늘을 배경으로 세 사람의 실루엣이 박혀 있었다. 잠시 후 횃불이 밝혀지고 트럼펫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밤하늘의 멜로디’와 함께 덕유산 남서쪽 기슭이 다른 시간, 다른 장소로 변하고 있었다. 세월호 참사 3주기를 이틀 앞둔 지난 4월14일 저녁, 전북 무주군 안성면 두문마을. 진도 팽목항, 목포신항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의 한 산골에서 조촐하지만 각별한 추모제가 열렸다.
‘하늘꽃으로 피어나소서’라는 주제로 치러진 이날 추모제는 지역 시민, 학생, 농민, 종교인 등 20여개 단체가 뜻을 모아 성사됐다. 기획에서 행사 진행 전 과정이 ‘풀뿌리’에 의해 이뤄졌다. 추모제의 시작을 알린 트럼펫 연주자는 지역 주민들로 구성된 ‘반디예술단’ 소속 목사님이었다. 이어진 합창, 살풀이, 판소리, 색소폰 연주, 낙화봉(落火棒) 점화, 희생자 호명 등 ‘추모 낙화제’를 위해 무대에 오른 이들도 모두 지역 어린이, 학생, 교사, 주민들이었다.
참사 3주기를 앞두고 서울 광화문광장을 비롯해 전국 곳곳에서 희생자의 넋을 기렸을 것이다. 거리에서 촛불을 들지 않았다 하더라도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거나 뭍으로 올려진 세월호 선체를 떠올리며 숨을 가다듬었을 것이다. 목포신항을 찾아 미수습자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게 해달라고 두 손을 모으기도 했을 것이다. 3년이 지났는데도 탈상(脫喪)을 하지 못해 아픈 마음들은 다투어 꽃을 앞세우는 봄날과 눈을 마주치기조차 힘들었을 것이다.
내가 두문마을을 찾은 것은 낙화놀이 때문이었다. 3년 전, 무주에서 국어교사를 하는 친구를 둔 덕분에 누대에 걸쳐 이어져온 전통 불꽃놀이의 정수를 볼 수 있었다. 두문마을 낙화놀이는 1930년대 후반까지 전승되다가 맥이 끊기고 말았다. 낙화놀이는 마을 서원에서 매년 여름 향학열을 북돋기 위해 행하던 책거리의 하나였다. 10여년 전 김익두 전북대 교수팀이 복원에 성공했고, 2007년부터 매년 여름 두문마을은 ‘불꽃이 춤추는 마을’로 변한다. 두문마을 낙화놀이는 지난해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56호로 지정됐다.
지난해 여름에도 낙화를 보기 위해 무주를 찾았다. 한여름 밤, 무주읍내를 가로지르는 남대천 위로 네 줄 ‘불의 띠’가 걸렸고 물 위로 ‘불의 황금 가루’가 흩날렸다. 그날 밤, 남대천변에서 세월호가 떠올랐다. ‘저 불꽃을 팽목항에 걸었으면….’ 낙화놀이가 단순한 ‘놀이’였다면 감히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을 것이다. 낙화는 현대식 불꽃과 다르다. 밤하늘에 거대하고 화려한 불꽃을 그렸다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그런 불꽃이 아니다. 탄환의 속도로 솟구치는 그런 불꽃이 아니다.
한 뼘 간격으로 매달린 수백개 낙화봉에서 떨어지는 불의 가루는 미세하면서도 찬란하고 고귀하다. 밝지 않은 빛, 뜨겁지 않은 불의 입자가 40분 가까이 수면 위로 떨어진다. 낙화는 물과 만나는 불이다. 입자들이 수직의 대열을 이루는 불이다. 바람이 불면 바람결을 따라 흩날리는 불의 춤이다. 그래서 수면을 응시하다 보면 놀라운 장면이 펼쳐진다. 물속에서 불이 올라온다. 물 위에서 떨어지는 불꽃이 물속에서 솟아오르는 불꽃과 수면에서 만난다. 똑같은 모양으로, 똑같은 속도로, 똑같은 거리에서 불이 물에서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된다.
“단원고 2학년 1반 언니 오빠들입니다.” 무주 지역 중·고등학생들이 한 명씩 나와 희생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기 시작했다. “고해인, 김민지, 김민희, 김수경….” 불꽃이 떨어지고 있었다. “2학년 4반 형 누나들입니다…. 박정훈, 빈하용, 슬라바, 안준혁….” 마을 아래쪽에서 바람이 치고 올라왔다. 낙하하던 낙화들이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2학년 10반 언니 오빠들입니다….” 노란 리본을 세워놓은 작은 배가 저수지 한가운데서 흔들렸다.
지역 교사가 나와 고인이 된 교사의 이름을 불렀다. “유니나, 전수영, 김초원, 이해봉….” 밤하늘에 별이 돋아나 있었다. 오리온자리가 이마 바로 위에서 선명했다. 일반인, 선원, 선상 아르바이트에 이어 미수습자의 이름이 봄 밤 속으로 퍼져나갔다. “고창석, 권재근, 권혁규, 남현철, 박영인, 양승진, 이영숙, 조은화, 허다윤.” 떨어지는 불꽃을 다 받아들이는 저수지 너머, 12시 방향이 진도 앞바다이고, 1시 방향이 목포 쪽일 것이었다.
추모 낙화제에 다녀오면 조금 진정될 줄 알았다. 하지만 나는 탈상은커녕 아직 초혼(招魂)의 단계조차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직도 희생자의 이름을 읽을 수 없다. 끌어올려진 세월호 선체가 우리 시대의 암 덩어리처럼 보인다. 애도가 애도다워야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는데, 그래야 이 봄날이 봄날일 수 있는데 아무래도 이 애도는 계속 유예될 것 같다.
세월호는 문제가 아니라 증상이다. 증상의 원인이 밝혀지지 않는 한 진정한 애도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나만의 생각일까. 이전 대선과는 다를 것 같았던 ‘장미대선’이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장미’가 ‘촛불’을 꺼버린 것 같다. 장미와 촛불, 촛불과 탄핵, 탄핵과 세월호, 세월호와 국가의 연결선이 희미해 보인다. 노란 리본을 단 다음날, 촛불을 켠 다음날, 그러니까 분노한 다음날, 그 많던 다음날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이념과 진영, 세대를 넘어 미안하다고, 잊지 않겠다고 그토록 다짐을 해왔는데.
이문재 | 시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일반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NGO 발언대]성폭력 피해자에게 강요된 용서와 합의 (0) | 2017.04.24 |
---|---|
[기고]‘요리법’ 대신 ‘음식법’을 권한다 (0) | 2017.04.24 |
[산책자]책방에서 독자로 거듭나기 (0) | 2017.04.24 |
[여적]은행강도 (0) | 2017.04.24 |
[편집국에서]여섯번째 법란 (0) | 2017.04.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