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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판사들이 쓴 보고서일까. 54쪽의 긴 진상조사 보고서를 두 번 읽고 낙제점을 매겼다. 보고서는 부당한 지시를 거부한 중견 판사의 억울함을 풀어주지 못했다. 의심을 거둘 때까지 증거의 끝을 좇지도 않았다. 잘못했다고 찔끔 적시한 것마저 책임 소재는 두루뭉술 퉁쳐버렸다. 열린 법정에 던져진 공소장이라면, 판사는 검사의 ‘성급한 단정’을 면박 주고 퇴짜를 놓았을 게다. 법원 내부통신망(코트넷)에 자조와 한숨이 넘치고, 판사회의가 꿈틀거리고, 시민사회 성명이 줄잇고 있다. 사법부가 자초한 여섯번째 ‘법란(法亂)’이 달리는 호랑이 등에 올라탔다.

보고서도 담았듯이 사법개혁을 화두로 삼은 법원 내 연구모임(국제인권법연구회)을 사법 수뇌부는 눈엣가시로 삼았다. 바람직한 대법원장상, 사법행정 참여 판사의 대표성 확보, 법관 독립을 위한 인사제도…. 지난해 7월부터 코트넷에 올라온 이 모임의 토론 결과물은 법원의 금기를 깼다. 역린을 건드린 것이다. 행정처의 강압과 회유는 올 들어 더 집요해졌다. 이 연구회가 사법 독립과 법관인사제도를 주제로 한 공동학술대회를 열기로 결정한 뒤다. 지난 2월 행정처는 판사들의 연구회 중복가입을 금지하고, 불응하면 최초 가입한 학회를 빼고 강제탈퇴시키겠다는 공지를 띄웠다. 보고서도 가장 늦게 만들어진 인권법연구회를 겨냥했다고 본 대목이다. 그러고는 이 연구회 기획팀장을 행정처 기획제2심의관에 발탁해 감시·회유 일을 맡기려다 사의를 표명하자 원대 복귀시킨 인사파동이 일어났다. 보고서는 연구회 판사들의 성향과 참여 정도까지 뒷조사한 양형위 상임위원(양형실장)의 대책 문건이 행정처 차장·처장 주재 회의에서 여러 차례 논의·실행된 사실을 적시했으나, 조직적 개입이나 블랙리스트는 없었다고 뚝 잘랐다.

물음표는 그대로다. 고법 부장급 양형실장은 졸지에 행정처를 움직인 ‘빅브러더’가 됐다가 모든 과오를 뒤집어쓴 ‘배드뱅크’가 됐다. 조직적 개입이 없었다는데, 대법관 승진 ‘0순위’ 자리에 있던 행정처 차장은 의문의 사표를 던졌다. 판사가 발령 인사하러 다니다 들었다는 ‘기조실 컴퓨터 속 비밀번호가 걸려 있는 판사들 뒷조사 파일’은 묻혔다. 행정처는 “그런 일이 없다”면서도 하드디스크 조사를 막았다. 판사 커뮤니티엔 “사법부에 ‘비선 실세 최순실’이 있고, 블랙리스트를 지휘한 ‘김기춘’이 있다”는 조소가 떴다.

대법원의 법관 탄압 의혹에 대한 진상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가 발표된 18일 양승태 대법원장이 서울 서초구 대법원으로 출근하고 있다. ㅣ연합뉴스

소장 판사들의 집단행동은 그간 다섯번 있었다. 초점은 정권의 외압(1971·1988년)에서 사법개혁(1993·2003년), 신영철 대법관의 촛불집회 재판 관여(2009년) 문제로 옮겨졌다. 작금의 사법파동은 그 종합판 성격이 짙다. ‘제왕적 대법원장’과 ‘사법 관료화’라는 적폐를 겨누기 때문이다. 행정처가 그토록 막으려 무리수를 둔 인권법연구회의 3월 학술대회에선 ‘판사 10명 중 9명이 대법원장·법원장에 반하는 의사표시를 하면 불이익을 당할까 걱정한다’는 설문 결과가 공개됐다. 판사들이 걱정하는 것은 근무평정(98.3%), 보직과 사건 배당(67.4%)이었다. 법관의 독립이 상시적으로는 인사권을 쥔 ‘윗사람’으로부터 더 위협받고 있다는 고백이었다.

공공의 적은 법원행정처였다. 대법원장을 보좌하며 인사·예산권을 쥔 행정처엔 처장(대법관)과 판사 34명이 일하고 있다. 사법연수원 기수의 10% 안팎만 경험하는 곳이다. 하나, 양승태 대법원장 체제에서 행정처 출신 판사의 십중팔구는 ‘법관의 꽃’으로 불리는 고법 부장판사(차관급)에 올랐다. 판사들의 선망과 질시를 받으며 행정처가 ‘보이지 않는 권력’ ‘사법부 하나회’로 불리는 이유다. 조직은 충성을 원하고, 나날이 커지려는 게 관료제 속성이다. 두 달 전 터진 인사파동도 행정처 새 발령자에게 “놀라지 말라”며 ‘이너그룹’에 들어온 마음가짐을 떠보려다 벌어진 사건일 수 있다. 법조계엔 “고법 부장을 포기한 판사, 다음 임지를 포기한 검사, 돈을 포기한 변호사가 가장 무섭다”는 말이 있다. 독립된 법관은 이제 내부로부터도 절실해진 현실이 됐다.

장삼이사들에게 법관은 하늘이다. 개개인의 운명을 결정짓고, 때로 국가 정책의 방향도 좌우한다. 어느 곳보다 위법한 관행이 덮어질 수 없는 것은 법치의 보루, 사법부인 까닭이다. “국민의 신뢰가 바로 사법권을 가진 법원이 존립할 수 있는 근거다.” 양 대법원장이 지난 3일 신임법관 임명식에서 한 말이다. 신뢰의 출발은 유의미하게 벌어진 사법파동의 진상과 책임자 규명이다. 제왕적 대법원장과 공룡이 된 행정처의 해법은 그 위에서 나와야 할 터다. 판사들은 입을 열고, 새롭게 안 문제처럼 유체이탈 화법을 쓰는 사법 수뇌부는 귀를 열 때다. 여섯번째 법란, 그 끝에 대법원장의 운명과 사법의 미래가 걸려 있다.

이기수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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