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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파크스와 버락 오바마. 두 사람을 연결시키기란 쉽지 않다. 유색인으로서 미국 현대사를 이전과 이후로 구분한 역사적 인물이라는 사실 말고는 공통점을 찾기가 어렵다. 잘 알려져 있듯이 파크스는 1955년 12월 버스에서 백인만 앉는 자리에 앉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나라’는 백인의 요구에 ‘노’라고 말하면서 인권운동에 불을 지폈다. 오바마는 2008년 11월 피부색과 정치경력의 한계를 뛰어넘어 대통령에 당선됐다. 둘 다 새 시대를 연 주역이다. 하지만 다른 공통분모가 있다.

시기적으로 반세기 넘게 떨어져 있는 두 사람을 만나게 한 이는 파커 J 파머다. 미국에서 ‘교사들의 교사’라고 불리는 파머는, 아서 자이언스와 함께 지은 <대학의 영혼>(이재석 옮김, 마음친구)에서 변혁적 대화를 강조한다. 60여년 전 파크스가 참여했던 하이랜더 민중학교 흔들의자 모임과 10년 전 오바마 후보 진영이 전개한 ‘캠프 오바마’가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파크스와 오바마를 이어주는 키워드는 대화다. 자기 체험을 솔직하게 나누는 열린 대화.

사회적 존재인 우리 각자를 사회에 편입시키고, 타자와 더불어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거의 유일한 매개이자 방법이 대화다. 대화 대상은 다양하다. 내 앞에 있는 사람뿐 아니라 동식물, 무생물, 기후, 풍경, 사물까지 포함된다. 이제는 지능을 가진 기계까지 끼어든다. 게다가 내 안에 있는 ‘수많은 나’와도 수시로 말을 주고받아야 한다. 문제는 우리가 대화하는 법을 잘 모른다는 것이다. 설령 머리로는 알고 있다 해도 그것이 가슴까지, 입까지 내려오지 않는다.

파머는 대화를 나누는 장소와 질문하는 방식에 주목한다. 미국 흑인 평등권 운동의 산실 중 하나인 하이랜더 민중학교 모임에서 핵심 역할을 한 것은 다름 아닌 흔들의자였다. 흑인과 백인이 마주 앉는 것 자체가 어려웠던 1950년대 중반, 흑백 간 대화를 주선한 마일스 호튼은 참석자들을 흔들의자에 앉게 한 다음 색다른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미국에서 흑인으로서 어떻게 살고 있는가. 백인인 당신은…. 자기 체험부터 털어놓으라고 한 것이다. 이야기가 오가자 접점이 생겨났다.

로자 파크스는 민중학교 흔들의자에 앉기 전까지는 흑인 문제에 큰 관심이 없었다. 모임에 참석하면서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생각이 굳어졌다. “분열된 삶을 살지 않겠다.” 자기 내면의 진리와 일치되는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하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파머에 따르면 적절한 조건을 갖추면 한두 사람을 움직인 대화가 마침내 제도와 문화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캠프 오바마의 경우를 살펴보자. 파머는 오바마가 대선에 승리한 결정적 이유가 ‘잘 조직된 변화적 대화’ 때문이라고 본다. 캠프 오바마 대화 참여자들은 서로 돌아가면서 자신의 상처와 희망이 담긴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공중 내러티브(public narrative) 모형을 활용한 것인데 참여자들은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공유하는 과정에서 ‘분열되지 않은 삶’을 살려는 의지가 커진다. 나의 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로, 지금·여기의 이야기로 확대된다. 파머는 캠프 오바마의 열린 대화가 ‘미국 역사상 가장 성공한 정치 캠페인’이라고 평가한다.

파머가 제안하는 대화의 조건은 단순하다. 우선 장소가 안전해야 한다. 변화를 바라는 사람들이 자기 집처럼 편안한 분위기부터 만들어야 한다. 그런 다음에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회의론자)들을 초청한다. 두 번째는 자신의 생각보다 자신의 체험에서 우러나는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라는 것이다. 지식이나 방법, 관점, 대안은 서로 틀릴 수 있지만 ‘자신의 이야기’는 틀리지 않는다. 개인적 이야기는 서로 다를 뿐이다. 생각보다 이야기를 우선해야 ‘영혼을 환대하는 공간’이 가능해진다. 파머가 줄곧 강조해온 ‘신뢰의 공동체’의 구체적 모습이다.

<대학의 영혼>의 주제는 대학 혁신이다. 두 저자는 교수직의 사유화와 분과학문의 단절, 즉 교육의 종말을 비판하면서 대학이 앎, 가르침, 배움을 통합해 미래 세대를 길러내는 공적 기관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이 책은 내게 ‘사회의 영혼’으로도 읽혔다. 대학 못지않게 우리 사회의 ‘영혼’도 피폐해져 있다. 그 원인 중 하나가 자기성찰의 부재다. 대학은 물론 국가, 사회, 개인이 자신을 들여다보지 않고 그래서 자기 이야기를 하지 못한다.

나는 촛불이 단지 정권교체를 위해 광장으로 나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권이 아니라 정치를 바꾸고 삶과 사회를 바꾸기 위해 촛불을 들었을 것이다. 흔들의자에 앉았던 로자 파크스, 캠프 오바마에 참여한 유권자가 우리의 촛불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1년 전, 시민들이 저마다 자신의 이야기로 촛불을 밝혔고 그런 촛불들이 적폐청산이란 ‘공중 내러티브’를 만들어내지 않았는가.

나는 이번 신고리 원전 5·6호기 공사 재개 여부를 놓고 진행된 ‘공론조사’에 적지 않은 의미가 있다고 본다. 결과는 실망스럽다. 하지만 일반 시민들이 숙의 과정을 통해 이견을 수렴했다는 사실 자체에서 희망을 찾고자 한다. 우리의 ‘잃어버린 10년’은 물론 유럽과 미국, 일본의 정치 현실이 보여주듯 민주주의는 언제 역주행할지 모른다. 촛불이 숙의 민주주의를 뿌리내려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촛불이 그랬듯 촛불 이후 또한 ‘나의 이야기’에서 시작될 것이다.

<이문재 | 시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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