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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 살 여고생 여덟 명과 선생님이 주인공인 다큐멘터리 <땐뽀걸즈>를 보고 돌아오는 길, 내가 하는 출판 일을 생각했다. 극적인 이야기를 끄집어낸 영상도 아닌데, 성적 9등급의 댄스스포츠반 소녀들의 웃음과 눈물이 너무도 강렬했기 때문이다. 작은 이야기처럼 다루었는데 소녀들이 감당하고 있는 현실의 무게도 실감 나고 교육 방향과 좋은 어른의 존재감이, 그 커다란 의미들이 속속들이 스며 있었다.
출판 일을 하면서 매번 무릎이 꺾이는 순간은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자문자답을 할 때다. 대단한 기획 아이디어가 떠올랐다고 흥분해서 시장조사를 해보면 이미 책으로 나와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서점에는 매일 신간들이 몇십 종씩 나오는데, 어떤 신간은 언젠가 본 듯한 낡은 느낌이고 어떤 신간은 참신하다. 내가 느끼는 이 감각적인 차이는 주제나 소재의 엄청난 간극이 아니다. 바로 ‘작은 새로움’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미 책을 낸 경험이 있는 검증된 저자의 ‘다른’ 책 이야기다.
비슷한 주제의 색다른 편집, 장르별 유사 도서에서 볼 수 없었던 독특한 제목과 카피, 디자인의 특별함과 제작 사양의 파격 같은 것에서 참신함을 느끼는 것이다.
읽을거리로만 책을 생각한다면, 지금 떠오르는 거의 모든 것은 이미 출간되어 있다. 적어도 서점에 한 시간 이상 있다 보면 그런 생각이 절로 들었으니까.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더 새롭게 만들 수 있을까.
먼 미래의 독자를 떠올리면서 책을 내는 것은 아니다. 어떤 책은 세월을 견디고 오랫동안 남아서 먼 미래의 독자를 만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책을 만드는 동안에는 당대 독자와 소통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조금 새롭게’ 만들기는 생각만큼 쉽지 않다. 왜 안 그렇겠는가. 모든 출판인이 새로운 기획과 편집, 디자인과 제작을 목표로 작업하고 있으니. 그 가운데서도 달라야 하는 것이니까.
<땐뽀걸즈>는 책 만들기의 고민과 기획 아이디어의 결핍으로 가라앉은 마음에 밝은 전구를 하나 켜준 듯했다. 작은 이야기처럼 시작하자. 무엇이든 작은 것부터 새롭게 간절하게.
거제도의 조선소 노동자를 취재하러 갔던 방송국 PD는 우연히 거제여상의 댄스스포츠반 소녀들을 만나게 된다. 댄스스포츠반 선생님이 늦은 저녁에 귀가하는 소녀들에게 직행인지 환승인지를 확인하고 손에 쥔 1000원짜리 다발에서 교통비를 꺼내 나눠주는 걸 목격하고 놀랐다고 한다.
그 장면에서 이야깃거리를 발견한 PD가 다큐 영상을 만들었다.
귀갓길을 걱정하는 선생님의 자연스러운 태도와 스스럼없이 교통비를 받아 가는 소녀들. 그들의 목소리와 눈빛이 빛났다.
교실에서는 졸거나 시험지를 채 풀지 않고 엎드리기 일쑤인 여덟 명의 소녀는 댄스스포츠 시간에는 사뭇 달라진다. 정확하게 리듬을 타는 율동을 위해 혼신을 다한다. 어느 각도에서 찍어도 가열차게 움직이는 모습이 담긴다.
좋은 어른인 선생님은 제대로 된 몸동작을 목표로 그들과 함께 살아내고 있었다. 정말 삶이 이루어지는 강당이었다. 연습하고 간식과 끼니를 나누는 삶. 대학 진학을 위해 학부모의 독려를 받는 훈련도 아니고 학업 부진한 학생들의 별도 관리도 아니다.
나이에 비해 고된 고깃집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가게 구석에서 댄스 스텝을 밟는 모습을 보면, 교육은, 소녀의 성장은, 삶의 무게를 어떻게 들어올리나를 되새기게 된다.
저예산 영화가 제작비 100억원을 들인 것처럼 삶을 다룰 수는 없을 것이다. 미학적 추구도 다를 터이다. 그러나 관객의 입장에서 삶의 가치를 일깨우는 것은 영화 규모나 스펙터클의 문제는 아니지 않을까.
내가 추구하는 출판은 그것이 시리즈가 되었든, 한 권의 문고본이든 주제와 콘셉트에 맞게 독자를 정확히 찾아가서 작은 울림을 전하는 것이다.
책을 만드는 열망은 책 읽는 사람의 표정을 달라지게 하고 싶은 것. 뭔가 산뜻한 기획이 없을까의 고민을 작은 이야기를 시작하듯 해야겠다. 카피 하나, 디자인 포인트 하나부터 지치지 말고 새롭게 해보자. 결국 작은 것으로 큰 그림이 그려진다는 신념으로.
“글쓰기는 디테일에서 스케일로, 비루한 것에서 거룩한 것으로 나아가는 거예요. 그 반대로 하면 웅변이나 선언문이 되기 십상이지요.” 이성복 시인의 글쓰기론이 사무친다. 출판도 이와 같지 않을까.
<정은숙 | 마음산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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