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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물주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듯 검찰은 300페이지에 달하는 공소장을 만들어냈습니다. 이 공소사실은 무에서 무일 뿐입니다. 저는 공소장에 대응해야 합니다. 무소불위 검찰과 마주서야 합니다. 하지만 제게 무기라고는 호미 한 자루 없습니다. 재판은 재판입니다. 공평과 형평이라는 우리 형사소송법 이념이 지배하는 법정이기를 바랍니다. 실체적 진실이 발견되고 형사소송법 원칙과 이념이 구현되는 법정이 되기를 원합니다.” 사법농단 혐의로 구속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보석 여부를 결정하는 재판에서 말했다. 

그러면서, 영민하고 사명감에 불타는 검사 수십명이 만든 공소사실에 대응하려면 사건을 잘 아는 당사자가 불구속으로 재판받아야 한다고 했다(하지만 보석은 기각됐다). 이렇듯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혐의를 다투기에 앞서 소송법 원칙을 설명했다. 같은 맥락에서 검찰이 공소장일본주의(一本主義)를 위반했다고도 주장하고 있다. 공소를 제기할 때 공소장 하나만 제출하라는 원칙이다. 판사와 배심원에게 예단을 주는 서류를 첨부하거나 그 내용을 인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공소장에 법령이 요구하는 사항 이외 사실을 적어 법원에 예단이 생기게 하는 것도 금지된다. 

공소장일본주의가 무엇인지 대법원이 가장 치열하게 논쟁한 판결이 문국현 사건이다. 2008년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하자 검찰은 낙선한 문국현 창조한국당 후보를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했다. 혐의와는 무관하지만 기업인 출신인 문국현 후보는 기업인 출신 이명박 후보가 부도덕하다고 비판했었다. 검찰은 공소사실과 관계도 없고 입증도 되지 않는 내용을 산만하게 공소장에 적었다. 이 정도라면 소송법에 따라 공소기각을 해야 한다고들 했다. 2009년 대법원이 문국현 사건을 선고했는데, 공소기각 의견을 김영란, 박시환, 김지형, 전수안 대법관이 냈다. 

그러나 주심 신영철 대법관을 비롯한 나머지 대법관들이 “1심에서 문제제기해야 했다”며 유죄를 확정했다. 신영철 대법관의 문장은 그다지 논리적이지 않은데 이때도 다르지 않았다. 요약하면 공소장일본주의 위반이 맞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라는 내용이다. 이런 애매한 다수의견을 보충하겠다고 나선 사람이 양승태 대법관이다. “공소사실을 특정하려면 그 배경과 과정을 자세하게 기재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양승태 대법관은 2011년 대법관에서 퇴임해 같은 해 대법원장이 된다. 임명자는 이명박 대통령이다). 

공소장일본주의에 관한 양승태 대법관의 보충의견은 이렇다. “사안이 복잡하거나 범행 수법이 교묘한 경우 또는 상황적 요소에 의해 범죄의 성립 여부가 좌우되는 미묘한 사안에서는 범행에 이르는 과정이나 그 배경 등 전후의 정황에 관한 설명 없이 단순한 범죄구성요건에 직접 해당하는 행위만을 기재하여서는 공소사실을 완성도 높게 특정할 수 없다. 이러한 경우 범행의 동기, 배경, 과정, 기타 정황적 사정을 필요한 범위에서 기재하는 것은 형사공판 절차의 자연스럽고 당연한 진행 과정이다.” 

여기에서 멈추지 않은 양승태 대법관은 피고인에게 도움이 된다고도 했다. “공소장에 기재된 공소사실에 의해 심판의 대상이 특정됨과 동시에 입증의 대상과 심리의 방향도 정해진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러한 기재는 오히려 피고인의 방어권 행사를 용이하게 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이렇게 결론 냈다. “공소장의 기재 내용은 필연적으로 증거로 확보되어 있는 내용의 축약판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인바, 증거에 의한 입증을 증거의 인용과 혼동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 의견이 법정의견이었다면 공소장일본주의는 사실상 폐기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형사법정은 검사의 놀이터, 판사의 휴게실, 전관의 영업장이다. 검사는 정의감으로 포장된 출세욕에 사로잡혀 사람들을 털어대고, 판사는 복잡한 기록만 들춰도 전문가 소리를 듣는 민사담당이 되기만을 기다린다. 전관은 전화 한 통이면 해결된다며 거액을 뜯어낸다. 국회와 언론도 다르지 않다. 국회는 작은 사건만 생겨도 형량을 올려 세계 최고 수준으로 만들었다. 언론은 삼류 수사관이 되어 혐의를 인정하라고 피의자를 윽박지르고, 피의사실공표죄의 도구가 되기를 애원한다. 

형사재판에 쓰이는 판례·법률 가운데 제대로인 게 드물다. 전문증거에 불과한 검사의 피의자신문조서에 증거능력이 있고, 이런 피의자신문에 묵비하면 구속영장이 발부된다. 일제가 본토에서도 안 하던 제도를 식민지 조선에 심었다. 해방 뒤에는 친일파 법률가들이 군사정권에서 유지했다. 피고인 양승태는 대법관 양승태와 싸워야 한다. 공소장일본주의 정도는 만만한 상대다. 그보다 강한 대법관 양승태들이 기다리고 있다. 피고인 양승태가 대법관 양승태를 이기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응원한다. 지금은 호미 한 자루 없지만 결국 밭을 일구고 인권을 전진시키리라 믿는다. 아이러니지만 역사란 이런 것이다. 양승태, 양승태를 이겨라.

<이범준 사법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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