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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소화 국립수목원 제공

능소화의 주홍빛 꽃송이들이 담장 아래로 다복하게 떨어져 있다. 유난히도 무더웠던 지난여름 그 뜨거운 태양 아래서도, 연일 쏟아붓던 빗속에서도 조금도 기죽지 않고 덩굴을 올리며 싱그럽고 기운차며 밝게 피어 있던 그 능소화가 이젠 계절을 보내고 있다. 능소화는 시들기 전에 꽃송이들을 툭툭 내려놓아 마치 석양에 물든 붉은 노을빛처럼 마지막까지 아름답다.

능소화를 생각하면 언제나 어릴 적 마당에 심어졌던 그 꽃송이들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마루에서 정원으로 이어지는 그 사이에 있던 퍼걸러(pergola) 위로, 흡착뿌리를 붙여가며 집의 벽면을 타고 오른 능소화 줄기가 이어져 아름다운 꽃송이들을 축축 늘어트렸다. 우리집 능소화는 여러 집으로 시집도 갔다. 당시엔 서울에서 능소화를 구경하기 그리 쉽지 않아 집에 놀러 오신 지인들은 특별한 능소화의 모습에 감동했고, 엄마는 원하는 모든 이들에게 뿌리가 달린 줄기를 나누어 주곤 하셨다. 생각해보면 꽃이든 나무든 작은 것이어도 좋은 것들은 나누던 여유를 가진 시절이었다.

작은 골목길로 이어지며, 능소화로 동네가 아름다운 모습을 만난 것은, 대학생 때 구례에 갔을 때로 기억한다. 보기만 해도 평화롭던 그 오래된 마을엔 집집마다 담장이며 대문 옆이며 곳곳에 벽을 타고 능소화가 자라고 있었다. 서울토박이였던 나는 언제나 그리운 고향이 있다면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넉넉하고 화려하지 않아도 집집마다 꽃이며 나무를 키워가며 살아온 세월의 기품 있는 흔적들이 묻어 있는 그런 곳 말이다.

능소화가 서울에서 보기 어려웠던 이유가 비교적 추위에 약했기 때문이라는 것도, 양반꽃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나무 공부를 전공으로 하면서 알게 되었다.

옛날에는 이 능소화를 양반집 마당에서만 심을 수 있어서 천한 계층의 사람들이 심으면 관가로 잡혀가 곤장을 맞았다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도 있다. 능소화가 한자어로 능가할 또는 업신여길 ‘능(凌)’자와 하늘 ‘소()’로 이루어진 것으로 미뤄보면, 하늘 같은 양반을 능가하고 업신여길 것을 염려해서였을까?

그러던 능소화가 어느새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꽃나무가 되었다. 기온이 높아져 감나무나 배롱나무처럼 나무를 심을 수 있는 북쪽 한계선이 올라온 덕분도 있고, 무엇보다도 벽을 타고 올라 꽃을 피울 수 있는 덩굴성 소재의 식물이 워낙 부족했던 차에 한여름을 이토록 시원하고 아름답게 장식할 능소화는 참으로 멋진 나무였던 것이다.

그런데 한동안 능소화 피는 계절이면 반복적인 민원으로 고생을 했었다. 일본 기록에 능소화 꽃가루에 갈고리 같은 구조가 있어서 사람들을 실명하게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가 퍼지면서였다. 이덕무(李德懋·1741~1793)란 이의 책에 ‘어떤 사람이 능소화를 쳐다보다가 잎에서 떨어지는 이슬이 눈에 들어가서 실명했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이 말은 ‘능소화 꽃가루가 위험하다’에서 나아가 여러 구체적 병명이 등장하게 만들었고, 어린이집이나 공원 등에서는 잘 키우던 나무들을 뽑아내는 지경에 이르렀다.

내가 일하는 국립수목원에서 실험연구를 해보았다. 능소화의 꽃가루를 전자현미경(SEM)으로 관찰한 결과 표면이 가시 또는 갈고리 형태가 아닌 매끈한 그물망 모양을 하고 있어 바람에 날리기 어려운 조건이고, 사람의 눈에 들어갈 확률이 낮으며, 들어간다 하더라도 피부나 망막을 손상시키는 구조가 아니었다. 또 식물체에는 독성이 거의 없고, 화밀(꿀)은 48시간 장시간 처리한 경우에만 일부 세포독성이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부러 오래된 꿀을 어렵게 모아 먹거나 아주 장시간 피부에 노출하기 전에는 우연히 실명에 이를 염려는 없는 것이다.

이렇게 연구하여 밝히면 될 것을 왜 그 여러 해 반복되는 숱한 소문과 염려를 양산했을까?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여러 단계의 심사를 거쳐 연구비를 받고, 그 결과를 평가받아야 하는데 이 주제는 그 기준에 적절하지 않아 학자들이 시도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싶다.

이 능소화 연구는 내가 포함되어 추진한 연구 중에서 가장 보람된 연구였지만, 많은 점수를 받는 높은 등급의 학술지에는 실리지 못하였다. 결과는 처음 밝혀진 사실이지만 이를 밝히는 데 사용한 기술 수준이 첨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연구자들이 세계의 교과서를 바꿀 만큼의 성과를 낼 수 있는 여건을 만들기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알고 지내는 한 교수님이 10년 넘게 한 주제로 파고들다보니, 이제 겨우 새로운 이론을 말할 수 있는 결과들이 가닥이 잡힌다고, 이는 연구비 없이도 지속할 수 있게 지지해준 아내의 이해 덕분이 크다고 하신 말이 머리를 맴돈다.

며칠 전 받은 정책교육에서 효율을 극대화한 성과에서 나아가 최선의 가치(Best vaule)를 찾아내고자 한다는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연구든, 정책이든, 개인의 삶의 철학이든 각자가 하는 일에 얼마나 섬세하고 진정성 있게 고려하고 실천해 가야 하는지 가을의 길목에서 생각이 깊어진다.

<이유미 | 국립수목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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