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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에서 연이어 발생한 ‘패륜범죄’는 분명 경악할 만한 사건이다. 화목해야 할 가정이 아동폭력의 온상이었고, 사망한 자녀의 시신을 훼손해 냉장고에 은닉하거나 그대로 방치한 채 버젓하게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했다는 사실이 충격을 주기에 충분하다. 이런 범행은 확실히 정상이라는 범주에서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평소에 이들이 보여준 행동은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었다.

언론은 두 사건의 ‘비정상성’에 초점을 맞췄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두 사건은 여러 가지 면에서 닮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두 사건은 아동 학대이긴 하지만, 부모 자신들이 암묵적으로 동의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범행이었다. 학대의 경우는 부모 중 한명이 훈육이라는 명목으로 무시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자녀가 사망했음에도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것은 흔하지 않은 일이다.

이런 동의는 왜 가능했을까. 암묵적 동의가 전제되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을 가족 내에서 발생한 이지메에 가까운 것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희생양을 만들어냄으로써 성립하는 이지메 행위는 집단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다. 이런 논리에서 이들에게 아동 학대라는 것은 가족의 결속을 방해하는 요소를 제거하기 위한 ‘정당한 행위’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이 역설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가족 내에서 작동하는 배제의 논리이다. 이 배제의 논리는 무엇일까. 보통은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가족 구성원들끼리 똘똘 뭉치는 것을 가족주의적인 특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가족의 울타리 안만 중요하지 밖은 중요하지 않은 폐쇄적 가족주의를 한국 사회의 문제점으로 지적하는 목소리도 없지 않았다. 사회적인 것이 있어야 할 자리에 가족이 들어서 있는 형국을 개탄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이번 사건은 기존에 문제시되어 왔던 이런 현실과 무관하지 않으면서도, 지금까지 타성적으로 이루어졌던 가족에 대한 인식을 뒤집어놓는 측면이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중학생 딸을 숨지게 한 뒤 방치한 부모가 유치장으로 이동하고 있다._연합뉴스


본격적으로 신자유주의가 삶의 지배 원리로 도입되면서 가족은 ‘인간 자본’을 배양하는 인큐베이터로 받아들여졌다.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라는 말은 속담의 수준을 넘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규범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제 자식 교육은 부모에게 사활을 걸어야 하는 정언명령이 된 것이다. 과거처럼 밥만 먹여 잘 키우면 되는 것이 아니라, 유·무형의 자산을 총동원해서 자식을 상위 10%에 드는 ‘인재’로 키워내야 비로소 부모는 사회에서 유능한 존재로 평가 받을 수 있게 되었다. 한국의 교육제도를 믿을 수 없는 부모는 과감하게 가족을 해체하는 결단을 내리기까지 했다. 가족을 위해 가족을 해체하는 이 기현상은 선진국 또는 정상국가에 대한 열망이 어떻게 근대적 개인을 만들어내기 위한 ‘대탈출’로 연결되는지 정확하게 증명하는 사례이기도 하다. 이 ‘대탈출’의 그늘이 ‘헬조선’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지금 현재의 부모들이 특별히 유별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조금만 둘러보면 이미 구한말부터 ‘유학’은 선진문물을 배우기 위한 ‘장도’로 권면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 최초의 근대소설이 결국 ‘유학생들’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다만 당시에 존재했던 국가적 지원이 사라진 상태에서 오직 가족만이 그 ‘유학생들’의 존립을 가능하게 해주고 있다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다. 그러나 이 차이는 사소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중대한 것이다. 가족이라는 출신 배경이 교육이라는 공적인 자산을 얼마나 취득할 수 있는지 결정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출신 배경에 상관없이 공평한 교육을 보장한다는 근대의 기획은 내부로부터 전복되어서 다시 근대 이전의 ‘기득권’을 위한 교육으로 돌아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부천 사건은 ‘비정상적인 개인’의 일탈 행위에 그치지 않고, ‘말을 듣지 않는 자녀’를 훈육해서 ‘인간 자본’으로 만들어내야 하는 오늘날 지배적인 가족의 실상을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자녀의 사망에 이들이 무덤덤할 수 있었던 것도, 그 사실을 은폐해서 자신들의 ‘정상성’을 유지하려고 했던 것도, 가족이 더 이상 외부의 압박을 막아주는 보호막이라기보다 그 자체가 자녀를 훌륭하게 키워내야 한다는 규범적 압박이기 때문일 것이다. 가족을 위해 가족을 파괴하는 역설이 반복되는 것이다. 영어로 가족(family)은 친숙하다(familiar)라는 말과 같은 어원이다. 이 친숙한 것이 낯선 것으로 드러나는 이 상황이야말로 신성가족이라는 정언명령이 어떻게 기이한 악몽으로 바뀌어버렸는지 보여주는 스크린인 셈이다.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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