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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경향신문의 문화면에서 설 연휴에 즐길 만한 책을 추천하는 코너를 보았다. 글을 쓰는 사람이기 전에 글을 읽는 사람으로서 이런 기사는 늘 반갑다. 설은 일년 중 가장 큰 명절이고, 또 휴가지만, 마음이든 몸이든 안 바쁜 사람이 없는 날이기도 하다. 잠깐잠깐 시간 날 때 넋 놓고 TV나 쳐다볼까, 책 속으로 빠져들 여유가 있기는 할까 싶기는 하지만, 그럴수록 마음을 새롭게 해보는 것도 좋은 일일 터이다. 설날에 시를 읽는 나를 상상해보는 순간, 일년 내내 시를 읽는 내가 보이는 듯했다. 근사한 상상이었다.
명절에 읽을 만한 책으로 추천된 것 중에는 종말소설도 있었는데, 그 이유가 뜻밖이었다. 전쟁 같은 명절의 현실과 세계 종말이라는 픽션을 엮어 농담 같은 추천사를 쓴 것일 터인데, 농담일 줄 알면서도 가슴이 서늘해졌다.
더 서늘한 것은 명절이 지나자마자 나오는 후속 기사들이다. 이혼율이 높아지고, 화병으로 병원을 찾는 사람들이 급증한다는 기사들은, 픽션이 아니라 논픽션의 세계에 관한 것들이다. 전쟁 같은 명절을 치르는 와중에도, 누군가는 시를 읽고, 가족들은 함께 모여 시를 읽는 마음으로 다정하게 만두를 빚을 터인데, 오히려 이러한 풍경은 픽션의 세계가 되어버리는 듯하다.
그 이유는 당연히 명절만 지나면 다시 돌아가야 할 현실에 있을 것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일년 365일 명절만 같으라는 덕담은 명절을 뺀 모든 날들의 현실에 대한 역설이고, 야유다.
경제활동을 하는 50대 여성이 지난 10년 동안 100만명 이상 증가했다는 통계청의 발표가 있었다. 100만명은 얼마나 많은 숫자일까, 잠시 궁금했었다.
사는 게 각박한 사람들은 전에도 이미 다들 먹고사느라 바빴고, 내가 아는 많은 사람들이 그랬기 때문이다.
식당과 마트와 아파트와 빌딩, 어디에서든 딱 그쯤의 나이로 보이는 여성노동자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바로 지금의 내 나이이기도 한데, 자식들을 대충 키워놓고, 이제 노년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고, 자식들을 키우느라 텅 비어버렸거나, 마이너스로 가득 찬 통장을 보면서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시기이기도 하다. 자식들이 떠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데, 노후는 준비되어 있지 않다. 정서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그렇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가 아니라 인생의 끝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한국 노인 10명 중 7명이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상태라고 응답했다는 보고서도 있다. 여기서 말하는 노인은 65세 이상의 사람을 말한다. 노인이라고 일컫기 죄송한 나이다. 지금 경제전선으로 서둘러 나가지 않으면 안되는 50대 여성들이라면, 더욱 그들을 노인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 나이쯤에 이르면 10년이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지 잘 알기 때문에 더욱 그러할 것이다. 보고서에서 65세를 기준으로 노인이라 일컬은 것은 그 나이가 아마도 정년퇴직을 한 이후이기 때문일 터이다. 정년이라고 해서 일터에서는 밀려났으나, 아직도 몸도 마음도 꿈도 너무나 청춘 같아서, 일을 잃는 순간 일자리를 잃는 게 아니라 길을 잃는 것 같아지는 나이이기도 할 것이다.
그 노년을 목전에 두고 있는 50대 여성들이 점점 더 많이 경제현장으로 나서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살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겠지만, 동시에 적극적으로 노후를 준비한다는 입증일 수도 있겠다. 노후를 준비한다는 말은 듣기에 따라서 꽤 여유로운 경제활동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대개의 경우에 있어 노후준비란 ‘여유로운 노후’가 아니라 ‘생존할 수 있는 노년’에 대한 대비다. 이런 경우 노동은 선택이 아니다.
인터넷에 ‘50대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은 뭐가 있나요?’라는 질문이 올라와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묘하게도 이 질문은 ‘50대 여성이 할 수 있는 특별한 일은 없다’라는 것처럼 읽힌다. 자식들을 키우느라고 나이만 먹어버린 사람이 갑자기 시작할 수 있는, 그럴듯한 일이 뭐가 있겠나. 대학을 나왔고, 어느 한 시기에는 직장을 다녔고, 제법 경력도 쌓았으나 그 모든 것들이 아무 의미도 없어져버린 50대라면 정규직을 꿈꾸는 것조차 가당치 않을 듯하다.
그래서 그들은 식당에서 서빙을 하거나, 마트에서 캐셔를 하거나 혹은 청소를 하면서 남녀 성차별을 겪고, 부당한 임금차별을 당하고, 비정규직으로서 당해야 하는 폭력적인 수모를 겪고, 심지어는 ‘아줌마’라는 단어 한마디에 들어있는 온갖 종류의 모욕을 겪어야 한다. 그들은 아직 누군가의 딸이고, 아직 누군가를 보살펴야 할 엄마이지만, 정작 그들 자신의 존재는 없다. 그들은 그저 가장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면서 모욕을 감당하는 익명의 존재들이다.
언젠가 동네 작은 식당에 갔다가 벽보 한 장을 보았다. 서빙을 하는 분들을 ‘차림사’로 불러달라는 내용이었다. 입말로 부르자면 ‘차림사님’이 될 터인데, 중요한 것이 어디 호칭이겠나. 차림사보다 더 높여 이모님이라고 부르고, 심지어는 어머님이라고도 부르는데. 중요한 것은 호칭보다 다른 데에 있을 듯하다.
그래서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10년 새 100만명이란 얼마나 큰 숫자인가. 비율로 얘기하면 매년 5~6% 증가하는 숫자라고 한다. 정책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수많은 노동자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그들이 그들로서 인정받는, 더 나아가 자기 발현을 할 수 있는 정책 말이다. 물론 그 전에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그들을 보호하는 정책이다. 정당하게 대우받고, 모욕당하지 않게 하는. 호칭이 아니라 내용으로 보호받고, 인정받는.
설 음식 장만을 하다가 배 하나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얼른 집어들었는데도, 한쪽이 물렁해져 있었다. 차례를 지낼 과일이 아니라 싼 것을 골라서 산 배의 이름은 ‘미달이배’. 정상 제품보다 모양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맛의 차이는 없다고 했다. 그 미달이배를 깎아보니, 떨어뜨린 자리가 거멓게 죽어 있었다. 노동현장으로 스스로 나가거나, 밀려나가는 많은 50대 여성들이 미달이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의 과육을 다 짜내고 점점 멍들어가는, 언제 부딪혔는지도 알 수 없는 멍이 온몸을 무르게 하는, 그렇더라도 여전히 그 존재를 잃지 않는. 명절 휴일이 끝나, 이제야 겨우 내내 젖어있던 손의 물기를 닦고, 또 돈벌러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 모든 여성들에게, 식상하겠으나 새해 인사를 보낸다.
김인숙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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