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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를 다시 읽고 있다.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함께 읽는다. 지난해 말 불교영어도서관에서 진행하는 윤독회에 참여하면서부터다. 십수년 전 <사진과 함께 읽는 삼국유사>를 교열 보면서 읽은 적이 있지만, 그때 보지 못한 것들이 이제야 보인다. 고전은 함께 읽을 때 얼굴을 드러낸다는 말이 실감난다. 삼국유사 전문가인 정진원 동국대 연구교수가 이끄는 윤독회에서는 <삼국유사> 영역본을 읽으며 강의하고 토론한다.

삼국유사는 우리 고대사의 최고 원천이며 저자 일연은 그리스의 헤로도토스에 비견된다. 삼국유사 연구의 지평을 연 육당 최남선의 말이다. 예전에는 이를 과도한 민족주의적 발언이라고 치부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가락국기’ 한 편만 꼼꼼히 읽어도 단박에 알 수 있다. 가락국기는 여섯 가야의 하나인 대가야에 대한 역사로, 삼국유사에만 나온다. 이것만으로도 책의 가치가 드러나는데, 더 중요한 것은 삼국에 가야를 포함시켜 사국의 역사를 남기겠다는 일연의 역사의식이다.

가락국기는 가야의 역사이지만, 김수로왕과 왕후 허황옥의 고사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로 수십명의 시종을 이끌고 건너와 수로왕의 왕후가 된 이야기를 신화나 전설로 치부한다면 그뿐이다. 그러나 비현실적이고 괴이하게 보이는 이야기도 신화학이나 종교학을 들이대면 아귀가 들어맞는 경우가 많다. 김수로왕의 ‘수로’가 정수리나 독수리의 ‘수리’에서 나왔음을 이해하면, 으뜸 왕이라는 이름에 부합한다. 하늘의 계시를 받아 바다 건너 가야에 온 인도 공주 허황옥의 이야기는 불교 남방전래설의 변형이라고 보는 학설도 있다. 가락국기에는 김해 해안에 내린 허황옥이 행궁에서 김수로왕과 혼례를 올리고 2박3일간 머무른 뒤, 왕궁으로 돌아갔다고 되어있다. 이를 오늘에 비추면, 수로왕과 허 왕후의 만남은 우리나라 다문화가정의 시초다. 두 사람이 함께한 2박3일은 최초의 허니문 여행일 테고. 김해에 남아있는 망산도, 승점, 주포, 능현 등의 땅이름은 2000년 전 허황옥이 첫발을 디뎠던 장소와 그때의 정황을 고스란히 전한다.

가락국기 한 편만 파고들어도 뽑아낼 콘텐츠나 스토리텔링이 무진하다. 가공하지 않은 역사책인 삼국유사는 수많은 구슬이 박혀있는 거대한 박옥이다. 괴이담도 있지만, 중국이나 서양의 황당무계한 신화나 전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버릴 게 하나 없는, 버려서도 안되는 이야기 역사책이다. 그런데 <오딧세이아>나 <산해경>과 같은 외국의 신화책은 떠받들면서 삼국유사는 외면한다.


LK:경북 군위 장곡자연휴양림 초입 화북리에 있는 인각사_경향DB


지난달에는 윤독회 회원들과 일연 스님이 주석하며 삼국유사를 썼던 인각사를 찾았다. 경북 군위의 깊은 산중에 자리한 인각사는 극락전과 명부전 등 전각 몇 개가 넓은 절터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인각(麟角)사의 ‘기린 뿔’은 부러져 있었다. 쪼개지고 마모된 보각국사비, 산골짜기에 굴러떨어져 ‘보각국사 정조탑비’라는 글자마저 희미한 부도탑은 안타까움만 더해줬다. 이나마 최근 애써 복원하고 보존하는 노력을 기울인 결과다. 군위군은 삼국유사와 인각사를 지역의 브랜드로 내걸었다. 몇 해 전 일연 스님의 어머니 묘소를 단장한 데 이어 지난해부터는 삼국유사 목판 복원 사업에 나서고 있다.

삼국유사를 알리고 이를 상품화하는 일은 필요하다. 삼국유사를 더 많은 외국어로 번역 소개하고 세계 기록문화유산에 등재시키는 노력도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선행되어야 할 것은 삼국유사 연구를 깊고 넓게 하는 일이다. 1927년 최남선이 잡지 ‘계명’을 통해 삼국유사를 소개한 이후 학계의 연구는 꽤 축적됐다. 번역 및 주석본도 이병도, 이재호, 이민수, 이가원, 이동환, 최광식, 고운기 등의 학자들에 의해 여러 종이 나왔다. 그러나 연구와 번역이 개별적이고 파편적으로 진행되면서 승수 효과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제는 기존 성과를 공유하고 학제 간 연구를 활성화해 삼국유사학(學)으로 나아가야 한다. 유관 학자들이 연구협의회를 구성하고 지자체 또는 대학, 불교 종단 차원에서 연구센터를 만드는 것도 생각해 볼 일이다. 나는 일본학자들이 낸 역주본 <삼국유사고증>(전5권)을 높이 평가한다. 그것은 개인의 성과가 아니라 삼국유사연구회의 40여년에 걸친 공력이 뒷받침됐기에 그렇다.

흔히 중국 3대 학문으로 둔황학(敦煌學), 장학(藏學·티베트학), 홍학(紅學·홍루몽 연구)을 꼽는다. 이들은 모두 중국 고유의 학문이면서 세계 학계가 함께 연구하는 분야이다. 나는 삼국유사가 이들 중국 삼학(三學)에 필적할 수 있다고 본다. <삼국유사>는 신화, 종교, 언어, 문학의 보고이면서 창조적 상상력을 보여주는 책이다. 우리 민족뿐 아니라 세계의 문화자산이 될 자격이 충분하다. 삼국유사학이 꽃필 날을 기대한다.


조운찬 | 경향 후마니타스연구소장 sido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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