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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리퍼트 주한 미 대사 ‘피습 사건’은 이제 거의 잊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사건의 ‘배후’를 의심했던 수사기관도 단독 범행으로 결론 내리고 사건을 종결지었다. 그러나 여전히 이 사건 당시에 목격했던 기이한 반응들은 쉽사리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특히 리퍼트 대사의 쾌유를 빈다는 명목으로 등장했던 일련의 ‘퍼포먼스’는 정상적인 것으로 보였던 것들이 돌연 비정상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기도 했다.

통합진보당 해산 이후에 한국에서 종북이라는 말은 비정상적인 것을 대표하는 하나의 상징어가 되었다. 이 상징어는 ‘괴뢰’나 ‘꼭두각시’라는 과거의 은유처럼, “자신의 자유의지를 버리고 북한을 무조건 추종한다”는 뜻에 가깝다. ‘광신’은 자율적 개인으로 분리되어 각자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질서를 잡아야 할 세계를 혼란에 빠트리는 해악이었다.

경제를 우선순위에 둠으로써 정치적 갈등을 해소하고자 했던 자유주의적 입장에서 ‘광신’은 더더욱 쓸모없는 열정의 소모에 가까운 것이었다. 지금 한국에서 유행하는 종북비판은 이렇게 해악적이고 쓸모없는 ‘광신’을 제거하고자 하는 합리성의 결과물이다. 따라서 종북비판과 ‘통일대박론’은 서로 대립한다기보다, 후자의 논리에서 전자의 논리가 등장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광신적인 북한 추종세력을 제거하는 것이 바로 ‘통일대박론’이기 때문이다. 이런 발상은 ‘조국통일’을 혁명 완수로 생각했던 북한의 논리를 정확하게 뒤집어놓은 것처럼 보인다.

박근혜 대통령은 미 대사 피습 사건을 “한·미동맹에 대한 공격”으로 규정했는데, 이런 논리에서 김기종이라는 비정상적인 것에 대비되는 정상적인 것은 ‘굳건한 한·미동맹’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현 정부와 그 지지자들에게 미 대사가 습격을 받은 사건은 단순한 해프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미동맹’이라는 정상적인 것의 근간을 뒤흔든 종북주의라는 ‘광신’의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그 뒤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다. 미 대사관이 있는 광화문 광장에 이른바 기독교인들이 쏟아져 나와서 집단으로 부채춤을 추었다. 미 대사의 쾌유를 빈다는 지극히 온정적인 마음의 발로였다. 프랑스에서 일어난 샤를리 에브도 테러에 빗대어서 “나는 리퍼트다”라는 구호가 등장하고, 미 대사가 했다는 “함께 갑시다”는 말이 주술처럼 반복되었다.

미 대사관 앞에 모여든 이들에게 그만큼 ‘한·미동맹’은 연약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종북주의라는 ‘광신’의 준동이 오늘날의 한국을 존재할 수 있게 만든 그 ‘한·미동맹’을 위기에 빠트리고 있다는 믿음을 공유했기에 집단적인 행동을 이끌어냈으리라. 이 집단적 행동에 놀랍게도 부채춤이라는 ‘퍼포먼스’가 있었다. 기독교인들이 모여서 부채춤이라는 ‘전통’을 전시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 왜 하필이면 부채춤을 추었는지 생각해보면 비밀이 풀리지 않을까. 부채춤이야말로 ‘만들어진 전통’을 대표하는 근대적 산물이다. 부채춤은 ‘조국근대화’의 상징이기도 하다. 한국적인 것을 이야기할 때, 빠짐없이 등장하는 소재 중 하나이면서, 전근대적인 농촌을 새마을로 바꾸었듯이, 전근대적인 것으로 치부되었던 무속의 제의를 근대적인 무용으로 만들어낸 것이 부채춤이었던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한국의 탄생과 형성은 냉전질서를 중심으로 한 미국의 세계체제 구축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이루고 있다. 이 세계체제에 적응하는 것이 한국 보수의 생존전략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한·미동맹’은 미국이라는 ‘타자의 시선’에 고정되어 있는 한국 보수의 정체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부채춤은 한국 보수가 보여주고 싶은 한국적인 것의 모습이고, 이것을 미국이라는 ‘타자’를 통해 인정받을 때 비로소 보수가 바라는 ‘한·미동맹’은 유지될 수 있다. 김기종이라는 ‘광신’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으로 부채춤은 ‘근대 예술’이라는 합리성의 이름으로 불려나온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어떠했던가. 자못 그 ‘합리성’이 자아낸 정경은 또 다른 ‘광신’에 가깝지 않았던가.

지난 달 7일 기독교단체가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의 빠른 쾌유를 기원하며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연 기도회에서 한복을 입은 여성들이 엎드려 절하거나 부채춤(작은 사진)을 추고 있다. _ AP연합


김기종의 행위를 ‘광신’으로 규정하는 그 입장 역시 ‘광신’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 김기종을 ‘괴물’로 규정하고, 자신들은 ‘괴물’이 아님을 ‘타자’에게 증명하기 위해 한국의 보수가 펼쳐 보인 퍼포먼스도 그 못지않게 괴물스러웠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보수의 입장에서 김기종이 한국 근대화의 나쁜 것을 다 모아놓은 결과물이었다면, 자신들의 부채춤은 반대로 한국 근대화의 좋은 것만을 다 모아놓은 결과물이었으리라. 그러나 결국은 나쁜 것이든 좋은 것이든 둘 다 ‘괴물’이었다는 불편한 진실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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