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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역사책을 즐겨 읽습니다. 역사를 통해 삶의 방향을 찾기도 하고, 위로받기도 하니까요. 제가 2012년 12월 고 윤길중 과거사 재심사건 ‘담당 검사 교체 합의’를 깨고 무죄 구형을 강행했다는 검찰의 거짓 해명으로 막무가내 검사가 된 후 억울해서 미칠 것 같았습니다. 정당한 이의제기를 묵살한 채 권한 없이 한 상급자의 직무이전 지시를 저와의 합의로 호도하는 수뇌부의 거짓말은, 제가 성폭력 사건을 수사하며 늘 보아오던, ‘피해자와 합의하에 성관계를 하였다’는 강간범의 변명과 다를 바 없더군요. 강간범의 변소를 대개의 사람들은 믿어주지 않지만, 검찰의 거짓말은 주류 언론과 많은 사람들이 믿어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얼치기 운동권 검사가 되었습니다.

진흙탕에서 허우적거리며 ‘오해와 손가락질을 견뎌낼 수 있는 의연함을 허락하시고, 어둠 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게 하시며, 만약 달리 희망이 없다면 제가 그 희망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문과 같은 기도로 견뎠습니다. 진실은 이 진흙탕에서 결국 연꽃을 피워 올리리라는 확신이 없었다면, 헤어나지 못했을 겁니다. 역사의 심판에는 예외가 없고, 권력으로 가리고 호도해도 진실은 끝내 그 모습을 드러내고 만다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지요. 그래서, 다행입니다. 

2018년 9월 15일 서울 정동에서 만난 임은정 검사는 2012년 과거사사건 재심에서 ‘백지구형’을 하라는 상부 지시를 어기고 ‘무죄구형’을 한 후 겪은 일들과 검찰개혁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그는 “검찰이 정치검찰의 오명을 벗으려면 위법한 명령을 내린 자와 기꺼이 굴종한 자들에게 책임을 반드시 물어 위법한 명령에 따르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 김창길 기자

<사기〉혹리(酷吏, 잔인하고 독한 관리) 열전을 읽다가 무릎을 친 적이 있습니다. ‘황제가 엄하게 처벌하고 싶어 하면, 장탕은 치밀하고 엄정하게 집행하는 관료에게 사건을 맡기고, 황제가 용서해주려 하면, 장탕은 관대한 관료에게 맡겼다.’ 2000년 전 역사가 등장인물 이름만 바꾸어 현실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으니까요. 유권무죄의 역사는 참혹하도록 질겨 끔찍하도록 유구합니다. 자동 배당을 가장한 통합진보당 재판 배당 조작, 법원 블랙리스트 등 사법 농단 수사로 드러난 법원 내부의 참상은 검찰과 그리 다를 바 없습니다. 시민들과 함께 비판하면서도 민망함을 감출 수 없네요. 시민들의 질타는 ‘검찰은 그렇다 쳐도, 법원 너마저!’의 절망과 분노일 테니까요.

제가 보고 들은 검찰 간부들의 직권남용 행태는 더 놀랍기만 한데, 조용히 잊혀지고 있지요. 그때 그 사람들이 자신은 결백한 양 사법정의를 외치며 열심히 수사하고 검찰개혁 방향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습은 곁에서 보기 민망하기까지 합니다.

법을 구부려 권력에 아부할 것을 넌지시 권하는 권세가에게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다’며 단호히 거절한 공자가 떠오릅니다. 법률가들에게 죄를 빌 하늘이 남았을까요? 권력에 영합하여 검찰권, 재판권을 마음껏 휘두르고 거짓말을 일삼으며 순간순간을 모면해 온 사람들이 아직도 법원과 검찰, 심지어 정치판에서 여전히 권력을 행사하고 있지요. 그들에게 볕이 드는 하늘이 아직 남아있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지난 ‘나는 고발한다’ 칼럼으로 지인들로부터 많은 전화를 받았습니다. ‘대검이 당황스럽도록 고요하여 아직 별일 없다’고 제 안위를 걱정하는 벗들을 안심시키고 있습니다. 대검은 <장자>에 나오는 목계지덕(木鷄之德)을 흉내 내며 위기를 넘기려는 듯합니다. 그러나, 검찰은 시시비비를 가리는 수사기관이지요. 사회 부조리를 파헤쳐 잘못을 엄단하면서, 정작 내부 치부에는 나무로 만든 닭을 흉내 내며 침묵한 채 시비를 가려 밝히지 않는다면, 검찰로 불릴 자격이 있을까요? 짠맛을 잃은 소금은 더 이상 소금이 아닙니다. 대검의 비공식적인 해명을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전해 들었습니다. 안태근 전 검사장 사건 기록에서 접한 전·현직 검사들의 숱한 거짓말들이 떠오르더군요. 그래서, 여전히 씁쓸합니다.

중국 진나라 무제가 고위 관료였던 산도를 탄핵한 이희를 칭찬하면서도 산도를 감싼 것에 대해, 사마광은 <자치통감>에서 “정치의 근본은 형벌과 포상에 있다. 이것이 불분명하고서야 어찌 정치가 이뤄질 수 있겠는가. 만일 이희가 말한 것이 사실이라면 산도는 벌해야 하고, 사실과 다르다면 이희가 칭찬 받는 것이 문제다. 이러고도 어찌 준법을 말할 수 있겠는가” 하고 한탄했습니다. 2015년 서울남부지검 사건 실체가 외부에 알려진 사실관계와 같다면 당시 감찰 담당자들을 직무유기로 입건치 아니한 현 검찰총장 등은 검사 자격이 없는 것이고, 잘못 알려진 것이라면, 해명해야 합니다. 의혹을 해소하지 않고서야 검찰총장이 준법을 말한들 어찌 무게가 있겠으며, 검찰개혁 논의에서 새어나오는 대검의 불협화음이 조직이기주의 발로가 아니냐는 의심 앞에 떳떳할 수 있을까요?

권력은 진실을 잠시 가릴 수는 있어도 영원히 가릴 수는 없지요. 검찰은, 법률가들은, 또한 모든 공직자들은 산전수전 다 겪은 시민들을 더 이상 속일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거짓말도 이젠 다 보이니까요.

<임은정 | 청주지검 충주지청 부장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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