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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어디서 본 인터넷 명언 중에 이런 게 있다. ‘나까지 나설 필요는 없다.’ 이 말은 요즘 젊은이들에 대해 오랜 시간 학교에서 함께 부대끼며 생각해 온 오찬호씨가 고민을 엮어 내놓은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라는 책과 일맥상통하는 데가 있다. 아직 내가 이십대였던 때, <88만원 세대>라는 책이 나왔다. 또래 친구들과 우리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되느냐고 한참 이야기할 때 그 고민을 함께 나눌 수 없는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88만원 세대>라는 책 제목에 일단 불쾌감을 표시하느라 우리가 장차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는 고민에 대한 동참도 거절했다. 그들의 말은 이랬다. 나는 88만원 받지 않을 거야! 물론 나는 네가 88만원보다 더 버는 문제와 다르다고 이야기하고 싶었으나 통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나는 그렇게 안 살 거’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렇게 살게 될 애들은 어떡하느냐고 묻는 것도 무안했다. 어떤 사회현상에도 무조건 “나는…”이라는 말밖에 하지 않는 그 친구들에게 자기가 보는 세상에서 없는 사람은 그냥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이런 친구들을 이기적이라고 금을 긋고 험담하는 것은 쉽지만 무언가 캄캄하고 질퍽하고 어둡고 커다란 그림자가 느껴졌기 때문에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를 읽고 보니, 그 그림자는 ‘자기계발’이라는 음모였다.


그때의 내 친구들보다 연령대가 내려간 만큼 이 책에 등장하는 젊은이들은 더욱 진화했을 것이다. 과연 정시가 아닌 수시나 지역균형 전형을 통해 대학에 들어온 동급생들을 ‘수시충’ ‘지균충’ 등으로 구분지어 부르는 것은 내가 보지 못한 광경이었다. 지은이는 이러한 스산한 풍경들을 우리 사회에 만연한 자기계발 강박으로 설명하는데, 불행하게도 우리 사회의 자기계발은 무조건 돈이다. 미취업자는 취업에 관련된 스펙을, 취업자는 이직이나 승진에 유리한 스펙을 키움으로써 자신의 경제적 가치를 높이는 것만이 사회에서 온당하다고 승인하는 자기계발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용산참사로 죽어간 아버지들은 안타깝지만 그러니까 불안정하게 장사하는 직업을 택하지 않도록 젊었을 때 잘 하지 그랬는가?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에게 해고되면 다른 살 길을 찾아야 하지 않는가? 라는 이들의 의문은 악의가 없는 진심이기 때문에 더욱 섬뜩하다. 이들은 남을 차별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도 ‘내가 수능을 망쳐서…’라고 혼잣말 같은 변명을 할 뿐 자신에게 가해지는 차별도 순순히 받아들인다. 그렇기에 취업 등으로 당당히 차별할 수 있는 위치로 가게끔 목숨을 건다. 그렇다, 빈곤한 삶이다.


일러스트 : 김상민


그러나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법. 네가 지금 이렇게 사는 건 다 너 때문이야, 라는 자기계발의 주문을 한계까지 투입받으며 자란 세대에게 다른 선택이 어디 있겠는가? 너까지 나설 필요는 없다, 라고 계속 투입받으며 성장한 세대에게서 도대체 이건 틀렸다고 나서는 사람이 어떻게 나오겠는가? 가장 무서운 것은, 차별이 당연시되는 사회에서는 자연스럽게 ‘체념’이 습관화된다는 것이다.


차별이 자연스럽게 체념되는 사회에서는 당연히 신분제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자기계발의 가치관이 지배하는 사회는 인간의 모든 것을 ‘스펙’화하고 계량화한다. 짐짓 우리가 계수할 수 없는 ‘척’하면서 점잖게 구는 연령이나 학력, 성차별을 말아야 한다는 주장마저도 시장의 지배 아래 묵살될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취업사이트에 33세 이하, 남, 대졸, 키 178㎝ 이상을 구한다는 구인 공고가 올라오면, 구세대들이나 분개하고 젊은 세대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저것도 그 기업에서 필요로 하는 인재의 스펙 아닌가요? 성매매에 대해서도 비난할 수 없게 된다. 살아남으려면 자기가 갖고 있는 인적 자원을 활용해야 하잖아요? ‘나까지 나설 필요는 없다’라는 주문을 뒤집지 않는 한, 디스토피아는 점점 생생한 현실로 나타날 것이다. 자기계발의 세계에 결코 ‘우리’는 없기 때문이다.


김현진 |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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