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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새해가 밝았다. 직장인에게 1월은 연봉협상과 연말정산을 준비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매년 이때쯤 연말정산을 준비할 때마다 ‘국세청은 이 모든 정보를 이미 알고 있으면서 왜 개인들에게 다시 서류를 내놓으라고 하는 걸까’ 궁금해지곤 한다. 


국세청에서 제공하는 간소화서비스로 카드명세서, 현금영수증, 기부금영수증, 의료비명세서, 보험내역서 등을 열심히 출력하고, 내역서를 적어 내려가다보면 멈칫, 하는 순간이 종종 생긴다. 고작(?) 더 낸 세금을 돌려받기 위해 나의 1년 지출 내역을 정부에 이렇게 시시콜콜 알려줘도 되는 걸까 싶어서 말이다. 물론 요 며칠 사이 세금이 쓰이는 용도를 보면, 이런 절차를 거쳐서라도 내가 낸 돈을 모두 돌려받고 싶은 심정이긴 하다.


파업을 한 노동자들을 잡겠다고 언론사 건물의 문을 뜯고 들어가 집기를 부수고, 개인적인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내역을 압수수색해 들여다보는 공권력의 행태는 점입가경이다. “그런 데 쓰라고 세금 낸 거 아니다”란 말이 절로 나온다. 아닌 말로 손상된 집기에 대한 손해배상이라도 청구되면, 그 돈도 세금으로 물어줄 거 아닌가. (얼마 전에 ‘국민연금의 국가지급 보장’을 명시하지 않은 개정안을 통과시켰는데, 이 정부는 국민을 세입원이나 자판기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심달훈 국세청 법인납세국장이 연말정산 종합안내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출처: 연합뉴스)



사실 국가가 세금을 써야 할 곳은 따로 있다. 경기도 마석이 그렇다. 가구전시장 90여개와 공장 400여개가 들어서 있는 마석가구공단에는 이주노동자들과 한센인, 공장주와 상인 등이 거주한다. 그런데 여기의 시설은 분교 1개와 소규모 마트 10여개, 식당 30여개뿐이란다. 병원, 약국 등은 고사하고 세탁소, 목욕탕, 지구대, 녹지공간, 산책로 등 편의시설도 전무하다. 마석은 그래서 행정시스템상으로는 한국일지 몰라도 일종의 자치구역이나 다름없다. 섬 여행가이자 인문학습원 ‘섬학교’ 교장인 강제윤 시인에 따르면 하루에 한 번 여객선이 들고나는 낙도, 통영의 수우도에는 아직도 변변한 의료시설이 없다고 한다. 대부분 할머니인 40여명의 주민들은 응급상황이 아니면 내륙의 병원을 찾아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한 달에 한 번 병원선이 오기만을 목빠지게 기다린다. 병원은 고사하고 보건진료소 하나 없는 이곳에서 이분들은 병원선만으로도 고맙다고 거듭거듭 감사해한단다. ‘외계의 행성’이 아니라 엄연히 대한민국이고, 2014년 현재 사람들이 엄연히 살고 있는 곳인데도 말이다. 사실 세금이란 건 이런 낙도에도 의사를 파견하고, 적자가 날 수밖에 없는 보건진료소를 짓고 제대로 운영되도록 하는 데 쓰여야 하는 게 아닐까. “바로 그런 오지의 의료서비스를 향상시키기 위해 원격진료를 도입하는 것”이란 소리는 하지 마시길. 이분들에게 필요한 것은 얼굴 맞대고 손 한 번 잡아주며 약을 건네고 주사를 놔주는 일상적인 의료서비스이지, 작동도 어려운 최신 기기로만 이용할 수 있는 원격진료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하지 않는 것이 가장 급진적인 운동이라면, 국민으로 살면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저항은 세금을 내지 않는 것이 아닐까. 정부가 올해 과징금과 과태료 징수 목표액을 크게 늘렸고, 세제 개편안에 따르면 직장인은 물론 자영업자도 세금 부담이 크게 늘어난다는데…. 공연을 보고 감동받은 만큼 비용을 내는 방식으로 화제를 모았던 후불제 공연처럼, 세금도 정책 따라 후불제로 내면 어떨까. 누군가는 마음에 들지 않는 정부에 대한 나름의 저항법으로 정부가 바뀌기 전까지 과태료를 내지 않겠다고 하던데, 뭔가 다른 방법은 없는 걸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고(故) 권정생 선생의 산문집 <우리들의 하느님>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긴긴 겨울밤 사랑방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동네 어른들에게 집주인은 메밀묵을 쑤어 대접을 한단다. 하고많은 밤참 중에 왜 메밀묵인가 하면, 90% 이상이 물로 되어 있는 메밀묵을 먹고 나면 자연스럽게 요의가 느껴지기 마련이니 기왕이면 손님 대접도 하고 보리밭에 줄 거름도 얻자는 것이다. 손님들은 저마다 오줌을 눠주는 것으로 묵값을 하게 되는 것이다. 손님을 대접하면서 자연스럽게 보리밭에 줄 거름도 얻어내는 현명한 집주인, 기분좋게 얻어먹은 묵값을 내는 손님들을 닮을 수는 없을까. 사랑방에서 나눠먹는 메밀묵 같은 세금이라면, 얼마든지 낼 용의가 있는데 말이다.


정지은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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