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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감’은 유행어가 되었다. 그 시작은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3년에 설립된 ‘자존감과 개인적·사회적 책임의 증진을 위한 캘리포니아 특별위원회’는 1990년 발간한 보고서에서 ‘자존감’(self-esteem)을 각종 범죄와 폭력과 중독 등의 예방을 위한 “사회적 백신”으로 제시했다. 인간은 이런저런 요소를 갖고 있어서가 아니라 원래부터 가치 있는 존재라는 메시지를 모두가 내면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핵심이다. 1960년대 후반에 시작된 너새니얼 브랜든의 자존감 이론 작업이 이 보고서로 탄력을 받았고, 보고서의 메시지는 <오프라 윈프리 쇼>를 통해 대중에게 보급되면서 날개를 달았다. 이후 자존감은 미국 전역의 학교 및 단체의 교육 목표 중 하나로 정립된다.

너새니얼 브랜든에 따르면 자존감의 두 핵심 요소는 ‘자기 효능’(self-efficacy)과 ‘자기 존중’(self-respect)이다. 전자는 ‘나는 해낼 수 있다’는 긍정적 확신이고, 후자는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는 안정적 확신이다. 여기서 의문이 생길 법하다. ‘효능’을 경험해봤거나 ‘존중’을 받아본 사람만이 그것에 대한 확신도 갖게 되는 것 아닌가? 가진 사람은 가지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 고무되어 더 갖게 되고, 못 가진 사람은 자신에게 그것이 없음을 아는 순간 더 잃는 것이라면? 이것을 ‘자존감의 역설’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자존감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들과는 거리를 두되, 다만 ‘자존감을 가지면(못 가지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만 생각해 보기로 한다.

자존감의 두 요소 중 ‘자기 존중’은 자존감 그 자체와 혼용될 정도로 본질적이다. 조앤 디디온의 전설적인 첫 책 <베들레헴을 향해 웅크리다>(1968)에 실린 ‘자기 존중에 대하여’(on self-respect)에 의지해 ‘자기 존중’의 메시지를 내 식대로 정리하면 이렇다. 첫째, 져도 된다. 모든 사회적 승부의 순간에 자신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이 자기 존중이다. 자존감이 없으면, “자신의 실패를, 상상과 현실에서의 실패 모두를 끝없이 기록한 다큐멘터리를 억지로 앉아서 보아야만 하는” 시간을 살게 된다. 둘째, 나는 나다. 나만의 기준이 나를 통치하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타자에게 휘둘리며 ‘사소한 일의 유령’에 시달리게 된다. “답장하지 않은 편지처럼 사소한 일의 유령이 터무니없이 큰 죄책감을 유발해 답장을 쓴다는 일 자체가 불가능해져버린다.”

최근의 여성 댄스 크루들 경연
자존심 넘어 자존감의 드라마로
반면 정치 신예 옹립한 야당
그 당의 정치인들 자존감은 뭘까
정당은 크루서 배울 능력 없는 듯

자기 존중의 두 번째 요소(‘나는 나다’)를 생각하면 독립적인 인간의 대명사 몽테뉴의 말이 떠오른다. “인간은 타인에게 자기를 빌려주기도 해야 하지만,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자기를 줘야 한다.”(<수상록> 3권 10장) 방점은 빌려주는(lend) 것과 다 주는(give) 것의 차이에 찍혀 있다. 슈테판 츠바이크가 변형한 다음 문장은 전자를 부연한다. “무슨 일에든 자기 자신을 완전히 내주어서는 안 되고 그냥 빌려주는 정도로 끝내야 한다”(<위로하는 정신>) 같은 구절을 제사(題詞)로 삼은 고다르의 영화 <비브르 사 비>의 한국어 자막은 후자를 강조한다. “타인 말고 자신에게 자신을 송두리째 던져라.” 이 둘을 합치면 완전한 번역이 된다. 그리고 이것은 자기를 존중하려면 먼저 자기라고 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말도 된다.

최근 여성 댄스 크루들의 경연과 남성 정치인들의 경선을 봤다. <스트릿 우먼 파이터>의 제작진이 초기에 조성한 것은 과장된 경쟁 구도였고, 그것은 자존감이 아닌 자존심의 서사로 보였다. 한때 동료였으나 이제는 결별한 두 사람의, 혹은 스승과 제자 관계인 두 사람의, 혹은 같은 노래의 안무 채택을 두고 경쟁했던 두 팀의, 자존심 대결. 그러나 이 서바이벌 서사는 서서히 자존감의 드라마로 변해갔다. 그들은 춤을 추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기거나 졌다고 우는 게 아니라 그런 각자의 자기 존중을 이해하고 응원하기 때문에 함께 울고 있었다. 가수의 뒤에 있던 때에도, 화제의 중심에 있는 지금도, 그들은 내내 ‘자기에게 자기를 주는’ 사람들이었다.

여당의 경선에도 정치철학은 없었지만, 역사가 긴 제1야당은 한 정치 신예를 단지 지지율이 높다는 이유만으로 대선 후보로 옹립했다. 그가 최악의 독재자에 대해 ‘학살은 했지만 정치는 잘한’ 운운한 것은 (그 캠프의 구호 중 하나인) ‘상식’에조차 미달하는 발언이다. 그런 후보 주변에 모인 숱한 중견 정치인들에게 정치적 자존감이란 무엇일까. 애초 존중해야 할 ‘자기’라는 것이 없었는가, 아니면 그것이 ‘친박’이나 ‘반문’처럼 언제나 두 글자짜리여서 모든 게 그토록 간단한 것인가. 몽테뉴를 뒤집어 말하면 이것은 ‘자기 자신에게는 자기를 빌려주고 타인에게는 자기를 다 줘버리는’ 일이 아닌가. 자존감에 대해서라면, 크루는 정당으로부터 배울 게 없고 정당은 크루에게 배울 능력이 없어 보인다.

신형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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