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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중과 선망과 존경은 비슷해 보이지만 억지로 구별하자면 못할 것도 없다. ‘존중’은 상대를 중히 여긴다는 뜻이다. 동의하지 않을 때조차도 인정할 만하다는 뉘앙스가 담겨 있다. ‘선망’은 부러워서 닮고 싶다는 마음이다. 동의는 당연한 전제이고, 노력하면 비슷해질 수도 있으리라는 기대도 없지 않은 상태다. 이와 구별되는 ‘존경’이란 무엇인가. 동의하지 않을 때라고는 없거니와 감히 닮기를 바라기조차 어렵다는 것이다. 이런 구별이 그럴듯하다면, 우리는 존중하는 사람 중 일부를 선망하고, 선망하는 사람 중 극히 일부를 존경한다고 해야 한다. 그러나 존경이라는 말은 인플레이션이 심하다. 여야 국회의원들이 서로 ‘존경하는 의원님’ 운운할 때가 그렇다. 존중이면 족할 곳에, 선망의 감정도 없이, 대뜸 존경이라니.

세 개념의 차이에 대해 좀 더 말해보자. “비평 에세이 한 편으로 31세 여성이 지성계의 스타 반열에 올랐다는 사실이 오늘날에는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1964년 미국의 동부 해안 지역에서는 가능한 일이었다.” 수전 손택, 20세기 후반 미국 지성계의 한 상징인 그가 등장할 당시의 분위기를 평전 작가 다니엘 슈라이버가 이렇게 묘사했다. 그 무렵 뉴욕타임스의 논평은 거의 열광에 휩싸여 있다. “갑자기 수전 손택이 거기에 존재했다. 그는 알려진 게 아니라 선포됐다.” 급진적인 미학적·정치적 주장을 매력적인 수사학으로 쏟아내던 그때 그의 별명은 ‘래디컬 시크’였다. 청년기 손택은, 동의할 수 없을 때에도 존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고, 동의할 수 있을 때에는 홀리듯 선망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노년기로 넘어갈 때의 손택은 또 다르다. 동년배의 문인들이 호화로운 해외 행사를 돌 때 그는 ‘아메리칸 펜센터’의 위원장직을 맡아 센터를 거의 인권단체로 바꿔 버렸고 (한국의 김남주 시인을 포함한) 세계 각지의 구속 문인 석방을 위한 압력 행사에 나섰다. 60세가 되던 해인 1993년에는 내전으로 대량학살이 자행되던 사라예보로 가서 <고도를 기다리며>를 무대에 올렸고, 지옥 같은 현장이 세계의 이목을 끄는 데 큰 기여를 했다. 2001년 9월11일의 테러 이후 손택의 태도는 더욱 놀라운 것이었다. 맹목적인 애국심에 매몰돼 있던 조지 W 부시 행정부와 언론을 보며 “소련 당 대회”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는 자국에서의 고립을 각오하고 외쳤다. “다 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 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

예술원법 개정 요구의 본질은
존경을 거두자는 게 아니라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는 것
‘예술원에 맞서서’가 아니라
‘예술원과 함께’에 답이 있다

청년기의 손택은 눈부시고 노년기의 손택은 고귀하다. 나는 전자를 선망하고 후자를 존경한다. 뛰어난 능력은 선망할 만하고, 그 선망이 가져다 준 영향력을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 사용하는 헌신은 존경할 만한 것이다(이런 헌신조차 자기 과시를 위한 것이 아니냐는 식의 날카롭고 싶어 하는 지적이야말로 평화와 인권보다는 훨씬 하찮은 목적을 위한 자기 과시일 것이다). 나의 목표는 더 겸허해서 정신만은 내내 젊어보자고 이런 문장을 쓴 적이 있다. ‘진행 중인 인간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찾아다니지만, 이미 완결된 인간은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찾아오기를 기다린다.’ 이제 이 이분법에 이런 말을 덧붙일 수도 있겠다. ‘존경받을 만한 인간은 스스로 영원히 진행 중이면서 또한 세계를 진행시킨다.’

존경이란 어떤 감정인가, 어떤 미덕이 존경받을 만한가. 두 질문에 답해 봤지만 다 아는 이야기다. 여기에 한 가지 질문을 더하자. 존경은 어떻게 표현하는 것이 좋은가? 계기가 있다. 소설가 이기호의 용기 있는 발의로 대한민국예술원법의 개정을 요구하는 문제제기가 시작됐고 후속 조처가 진행 중이다. 기존 회원이 신입 회원을 선출하고, 임기가 평생이며, 월 180만원의 정액 수당을 받는 것 등이 적절한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기호 작가는 현재 예술원 회원 개개인의 자격을 시비하는 데 목적이 있지 않고 단지 돈을 주느냐 마느냐의 문제만도 아님을 강조했다. 그래서 ‘월 180만원 받는 원로들에 문인 744명 “무보수로 개정하라” 성명’(중앙일보)과 같은 헤드라인은 적절하다고 하기 어렵다.

그에 따르면 이번 논의의 본질 중 하나는 “국가와 예술가의 관계 설정을 다시 묻는 일”(경향신문 8월4일자)이다. 이를 내식대로 바꾸면 이렇다. ‘우리는 존경받을 만한 이들에게 가장 정확히 존경을 표현하는 문화적 형식을 갖고 있는가?’ 국가가 예술가를 존경할 수는 있겠으나 그것이 한 달에 180만원을 주는 것이어야 할까. 존경을 거두자는 게 아니라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돈을 좇으며 살지 않은 다수의 예술원 회원들은 180만원에 초점이 맞춰지는 현 상황에 모욕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이기호 작가를 비롯해 성명서에 서명한 문인 744명이 원한 바도 아닐 것이라고 감히 짐작한다. 그러니 답은 ‘예술원에 맞서서’가 아니라 ‘예술원과 함께’ 찾아질 수도 있으리라.

신형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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