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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햇살이 뜨겁다. 풀매기 딱 좋은 날씬데 방해꾼이 생겼다. 마늘밭을 맬 때는 마늘밭을 짓밟았고 양파밭으로 옮겨 풀을 매면 또 그쪽으로 와서 여린 양파줄기를 밟아 부러뜨렸다. 괭이로 감자 골을 타니 어느새 세 놈이 감자 골을 하나씩 꿰차고 쭉 엎드려 앞발 위에 얼굴을 놓고 눈까지 감는다. 괭이로 엉덩짝을 밀어도 꿈쩍도 하지 않고 덩치로 버틴다. 복실이, 까뭉이, 솔이. 이렇게 세 놈이다.
농장 빈터로 개집 두 개를 옮겨와서 큰 말뚝을 박고 두 놈을 매놨더니 세 놈이 다 거기서만 논다. 다행이다. 채식하는 주인을 닮아서인지 민들레 이파리도 먹고 세어빠진 냉이도 뜯어 먹는다. 기특하다. 밤에는 집을 지키게 하려고 솔이만 데려다 맛있는 음식을 줬는데 아침에 보니 복실이가 말뚝을 쓰러뜨리고 집으로 와서 솔이에게 작업을 걸고 있지 않은가. 안 된다. 이 녀석들과 나와의 애정에는 변함이 없지만 나는 이들을 믿지 못한다. 수놈인 복실이도 그렇지만 암놈인 솔이도 이제 믿을 수 없다. 이들의 엄마인 까뭉이도 믿지 말고 모자지간에 불상사가 없게 감시하라는 충고도 들었다.
복실이와 형제지간인 쟁이가 여자친구를 임신시켜 출산까지 했다는 소식을 엊그제 들어서다. 그 집 주인이자 내 친구는 태어난 지 열 달도 안 된 쟁이가 그럴 줄 몰랐다면서 강아지를 여섯 마리나 낳게 했으니 나더러 몇 마리 데려가란다. 큰일날 소리. 지금 있는 세 마리도 힘겨운데 어떻게 또! 이런 사태는 까뭉이와 한 약속이 그 뿌리다. 옆집 강아지가 너무 귀여우니까 어머니가 탐을 냈고 집에 데려와 키우게 되었다. 털은 물론 눈이랑 발톱까지 까매서 어머니가 까뭉이라 불렀다. 4년 전의 일이다. 어머니가 작년에 돌아가시자 나는 까뭉이와 약속을 했다. 자연사를 할 때까지 같이 살겠다고.
영화감독 황윤_녹색당 제공
이런 약속은 까뭉이가 어머니의 분신 같아서만이 아니다. 이번에 녹색당의 비례대표로 출마한 황윤 감독의 영화를 봤던 것이 화근(?)이면 화근이다. 최근에는 <잡식가족의 딜레마>라는 영화를 통해 공장식 축산 동물의 복지 문제를 다루었는데 훨씬 전에 본 영화는 <어느 날 그 길에서>였다. 차량에 치여 도로에서 죽어가는 죄 없는 동물들 영화다. 그 충격이 너무도 커서 2011년 구제역 사태 때는 내가 활동하는 ‘천도교 한울연대’에서 인간 때문에 죽어간 동물신위들께 천도제를 지내기까지 했고 동물보호단체인 ‘카라(KARA)’에서 ‘숨’이라는 잡지를 만들 때 참여하기도 했다.
황윤 감독의 영화 충격은 계속 이어져서 까뭉이가 첫 새끼를 낳았을 때 강아지를 달라는 사람들에게 까다로운 조건을 제시하게 되었다. 그것이 내가 개를 세 마리나 키우게 된 사연이기도 하다. 절대 잡아먹지 말 것, 팔지 말 것, 버리지 말 것, 수명이 다할 때까지 같이 살 것을 요구했으니 강아지 가지러 왔다가도 다들 그냥 가버렸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내 의도를 알아챘는지 죽음과 버림의 공포를 떨쳐버린 이놈들이 기고만장이다. 내 발등 위에 올라앉아 아예 걷지를 못하게 하고 묻어 놓은 감자도 빼 물고 줄행랑을 친다. 이제는 대놓고 남매 간 연애질이다.
동물권 선거운동본부까지 출범시킨 녹색당에 문의했더니 내가 사는 곳에서 가장 가까운 전주에서 안심하고 시술할 수 있는 동물병원을 가르쳐주었다. 복실이 중성화 수술이다. 마음에 좀 걸리긴 해도 현재로서는 가장 최선의 방법이란다. 남의 집 암캐를 임신시키지 않아야 하고 다른 수캐가 우리 집에 와서 껄떡거리면 복실이가 사내의 자존심을 걸고 까뭉이와 솔이를 지켜줄 것이라는 기대도 있다.
밭으로 이사해 살게 된 이놈들 중 풀을 가장 잘 뜯어 먹는 놈과 똥을 싸서 파묻는 놈에게 포상을 할 생각이다. 집에서 맛있는 음식도 먹고 하룻밤 잘 수 있게 하는.
전희식 | 농부·‘땅살림 시골살이’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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