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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직설

잡담과 간식

opinionX 2019. 4. 9. 11:20

글쓰기 수업은 글쓰기 외에도 여러 요소로 구성된다. 글을 쓰는 시간이 주를 이루기는 하나 그 앞뒤로, 혹은 사이사이로 끼어드는 딴짓이 있다. 나는 그런 딴짓의 시간이 수업을 지속시킨다고 믿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글쓰기란 안 하는 게 더 편한 일이다. 귀찮음을 극복해야 시작할 수 있다. 무엇이 아이들의 귀찮음을 무릅쓰게 만드는가. 나의 오랜 탐구 주제였다. 

수업을 시작하면 입을 쭉 내밀고 토라진 얼굴로 앉아있는 아이가 보인다. 집에서 가만히 쉬고 싶어서 꾀병을 부려 보았지만 부모님께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각을 하는 아이들도 있다. 올리브영 같은 화장품 가게에서 샘플을 발라보다가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것이다. 모두 다른 컨디션과 다른 사연을 가지고 모인다. 그들과 가장 먼저 하는 건 근황 토크이다. 지난 한 주간 어땠는지, 전하고 싶은 소식이 있는지 내가 묻는다. 성의 없이 물으면 성의 없는 대답이 돌아오기 때문에 우선 내 근황을 솔직하게 전해야 한다. 굿 뉴스로는 2년 만에 드디어 교정기를 뺀 사실을, 베드 뉴스로는 어떤 잡지에 연재를 하다가 잘렸다는 사실을 털어놓는다. 

그럼 아이들도 자신의 최근 소식 중 몇 가지를 엄선하기 시작한다. 날마다 다른 변수와 디테일이 추가되므로 말할 거리는 언제나 생겨난다. 글쓰기를 싫어하는 아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어떤 아이는 글쓰기 수업을 가는 버스 안에서 근황 토크를 준비한다. 또 다른 아이는 카톡 대화 내역을 뒤져보며 한 주간 주고받은 텍스트를 살펴본다. 자신이 말할 차례가 오면 다들 이렇게 말문을 연다. “저는요….” 이어지는 이야기는 매주 다르다. 소식을 다 전하고 나면 옆에 있는 아이에게로 고개를 돌린다. 나 말고 다른 이에겐 어떤 소식이 있는지 듣는 게 도리이기 때문이다.

이런 잡담을 주고받는 동안 서로를 재미있어 하는 마음과 걱정하는 마음이 생겨난다. 부러운 마음이나 못마땅한 마음일 때도 있다. 남들의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듣는 사이에, 자신의 이야기를 더 하고 싶은 욕망이 아이들 마음속에서 달궈지는 것을 나는 본다. 우리는 남에게 관심을 가지면서 무수히 많은 걸 배우는 존재들이니까. 칠판에 글감을 적는 것은 그 무렵이다. 아이들은 고민을 시작한다. 그리고 나는 간식을 준비한다. 

열세 살 김도현은 이렇게 썼다. “글감이 주어지면 난 먼저 망설인다. 몇 분간 첫 문장을 생각하며 옆에 놓인 간식을 한 입 베어 먹고 뚫어지게 글감을 쳐다본다. 머릿속에 무언가 스쳐 지나가면 빠르게 캐치해야 한다. 스토리를 구상하고 내가 만족을 느낄 것 같으면 그때부터 쓰기 시작한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좋다. 어쩔 때는 어려운 글감을 만나면 스스로에게 만족을 못 느낄 것 같아도 일단 써본다. 그러면 다음에 어려운 글감을 또 만나도 전보다 더 잘 써진다.” 빈 원고지를 앞에 둔 외로운 시간에 누군가는 간식의 힘을 빌려 첫 문장을 쓴다. 글쓰기 수업을 간식의 맛으로 기억하는 아이도 있다. 

열네 살 최가영은 이런 문장을 썼다. “글방에 다닌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참 다양한 간식들을 먹으며 참 많은 글을 썼다.” 이렇게 쓰고서 최가영은 어쩐지 먼 곳을 보는 것 같았다. 글쓰기는 글쓴이를 멀리 가게 만들기도 한다. 미래로든 과거로든, 나에게로든 남에게로든 말이다. 그리고 간식은 멀리 갈 체력에 보탬이 된다. 열한 살 김지윤은 수업에서 가장 인상적인 순간에 관해 이렇게 적었다. “간식으로 나온 가래떡을 언니들이 손으로 가지고 놀던 광경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 가래떡을 가지고 놀던 언니인 열다섯 살 오승아가 쓴 인상적인 순간은 또 다르다. “글방에서 누군가가 특이한 소리로 재채기를 해서 선생님을 비롯한 모두가 웃었을 때. 몰래 먹은 야식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생리컵에 대해 말했을 때. 기다란 가래떡을 먹으며 이걸 찍어먹을 간장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때.”

서로 다른 기분과 기억을 가지고 집에 돌아간다. 글쓰기란 여전히 귀찮은 일이지만 아이들은 잡담과 간식을 기억하며 다음주에도 늦잠을 포기하고 수업에 온다. 떠들며 먹고 마시다가 명문장이 얼렁뚱땅 탄생되는 날들이었다.

<이슬아 ‘일간 이슬아’ 발행인·글쓰기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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