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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직설

이방인냉면

opinionX 2019. 4. 4. 13:42

“봄바람이 건 듯 불어 잠자던 모란대에 나무마다 잎 트고 가지마다 꽃피는 3, 4월 긴 해를 춘흥에 겨워 즐기다가 지친 다리를 대동문 앞 드높은 2층루에 실어놓고 패강(浿江, 대동강) 푸른 물 따라 종일의 피로를 흘려보내며 그득 담은 한 그릇 냉면에 시장을 맞출 때!”

식민지시기의 인기 잡지 ‘별건곤’ 1929년 12월호에 실린 평양냉면 예찬의 한 대목이다. 오늘날의 한국어로 풀어 써도 바로 읽기가 만만찮다. 요컨대 봄바람 살랑 부는 봄은 생명이 움트는 봄의 정취에 취해 대동강 푸른 물 따라 놀기 좋은 때이며 “가득 담은 한 그릇의 냉면”의 제철이라는 소리다. 여기서 평양냉면을 수식하는 한마디는 “사시명물(四時名物)”이다. 곧 봄여름가을겨울의 냉면 맛이 다 따로 있으니, 사계절이 다 이유 있는 냉면의 제철이라는 뜻이다.

냉면은 식민지시기에 이미 사계절의 별미로 대중에게 자리를 잡았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의 미식가 심노숭(沈魯崇, 1762∼1837)의 품평도 있다. 심노숭의 입에는 메밀국수라면 평안도 것이 최고이고, 그 가운데서도 차게 조리한 국수가 더욱 좋았다. 심노숭이 냉면의 원형에다 지역과 조리법에 미식 담론을 더한 때는 유럽 미식학의 새 장을 연 장 앙텔름 브리야사바랭(Jean Anthelme Brillat-Savarin, 1775~1826)이 프랑스 음식을 열심히 먹고, 먹은 만큼 문자먹방을 하던 때와 겹친다.

이런 이야기를 꺼내니 마침 새봄에 냉면을 들던 눈 파란 사람이 하하 웃는다. 한때 북미, 유럽에서는 젓가락질할 줄 알고, 게다가 아무렇지 않은 듯 ‘스시’와 ‘사시미’를 먹을 줄 알면 제법 힙스터 행세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요즘 한국에 온 이방인 가운데는 그럴듯한 낯빛으로 “아일럽 냉면!” 하고 말하지 못해 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냉면을 해치움으로써 힙스터 단계 승급을 바라는 이도 더러 보인다. 그야말로 세상이 바뀌었다. 몇 해 전만 해도 낯선 음식, 못 먹으면 할 수 없지 하는 분위기가 우세하지 않았나.

잠깐 설명이 필요하다. 음식에서 영어권의 ‘hot’ 그리고 ‘cold’는 뜨거워 입천장 까질 지경이나, 이뿌리 시릴 만큼의 차가움이 아니다. 내가 사는 지역 일상의 상온에 견주어 따듯한 정도, 상온 또는 상온보다 살짝 식은 정도가 각각 그네의 ‘hot’이고 ‘cold’이다. 이 땅에 온 많은 이방인이 극단적으로 뜨겁거나 극단적으로 찬 먹을거리는 별로 경험한 적이 없다. 그러니 설렁탕, 삼계탕, 콩나물국밥 등을 코앞에 두고, 바로는 먹지 못하고 숟가락으로 국탕의 표면을 살살 헤집으며 제발 한 김 빠지기를 기다리는 모습, 막 끓어오른 전골을 접시에 덜고서도 한참 기다리는 모습은 그네로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냉면에서도 그랬다. 많은 이방인이 살얼음 엉긴 냉면 대접, 또는 얼음이 풀렸다 해도 표면에 이슬 맺힌 면기를 받고 나면 잠깐 멀뚱멀뚱이었다. 같이 앉은 한국인 흉내를 내 육수를 들이켰다가도 싱긋 웃으며, ‘실례지만, 나는 냉기 더 빠지면 먹을게’ 하는 몸짓과 표정을 보이곤 했다. 그러다 확 달라졌다. 너 냉면이야? 나 미식가에 힙스터야! 아시안 퀴진과 코리안 퀴진 다른 줄 알아. 전에 없던 ‘cold’도 감수하고, 볼 미어터지게 사리도 우겨 넣고, 제법 호쾌하게 면기를 탁자에 탁 내려놓을 줄도 알아야지! 하는 이방인들과 더러 냉면을 들게 된다. 여기 이르기까지 억지는 소용이 없었다. 

외국인들아, 제발 한국 음식의 대단함을 좀 알아줘 하는 안달복달은 늘 효과가 없었다. 자연스럽게, 흐르는 물처럼, 우리는 외래 음식을 감각하고 소화한다. 뒤집어도 마찬가지일 테지. 그런지 안 그런지 이방인 친구를 데리고 새봄에 냉면 나들이 한번 하시라. 중간에 “심노숭이라고 브리야사바랭이랑 동시대인이야.” 한마디 슬쩍 찔러 보시라. 그네도 마찬가지다. 내 눈앞의 음식이 연원 깊다는 사실을 멋쟁이의 문자 속으로 증거하면 어쩐지 더 대단해 보이게 마련이다. 분위기 됐을 때 내놓으면 된다. 먹고 있을 때, 듣고 싶을 때 슬쩍 나를 꺼내 보이기. 광고홍보는 이쯤으로 충분하다.

<고영 음식문헌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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