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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참으로 밋밋한 행성일세!” 만일 20억년 전쯤에 지구를 둘러본 외계인이 있었다면, 그의 일기장에는 이처럼 씌어있을지 모른다. 그런 그가 타임머신을 타고 10억년 전쯤으로 다시 왔다면? 형형색색의 화려한 지구를 보고는 깜짝 놀랐을 게다. 대체 지구에선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바로 성(sex)의 출현이다. 생명이 출현하고 23억년이 지나도록 지구에는 무성생식(유전자세트를 자식 세대에 그대로 물려주는 방식)을 하는 생명체밖에 없었다. 복제 오류가 발생해야만 조상과 후손의 유전자세트가 달라지는 세상이었으니 다양성은 미미했다. 이런 밋밋한 지구를 화려한 행성으로 변모시킨 터보 엔진이 바로 성(性)이다.
유성생식(부모의 유전자세트를 섞어 자손을 만드는 방식)이 왜 진화했는가는 진화학계의 가장 흥미로운 질문 중 하나다. 대답은 미생물과 깊은 관련이 있다. 성은 세균, 바이러스, 기생충 등 미생물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해 생명이 만든 필살기였기 때문이다. 무성생식을 하는 경우 치명적 미생물이 한번 침입하면 후대마저도 멸절에 이를 수 있다. 유전적으로 대항할 무기가 없기 때문이다. 15억년 전쯤 생명은 유전자 칵테일 기법을 통해 조상 세대에는 치명적이었더라도 후대에는 그렇지 않게 만들 비책을 진화시켰다(연애 시 ‘밀당’의 기원이기도 하다). 이것이 바로 성의 탄생을 통한 유전적 다양성 전략이다.
코로나19에 인류의 ‘신체’는 지금 속수무책이다. 이 바이러스의 항체를 만들어내는 유전자가 현재 인류의 유전자 저장고 안에 많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백신이나 치료제가 제때 개발되지 않고, 코로나19의 항체 형성 유전자가 인류의 유전자풀에서 유성생식을 통해 지속적으로 출현하지 않는다면, 이 바이러스는 77억 인류의 난적으로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유전적 다양성도 코로나19 면역을 위한 비책이요, 인류의 희망인 셈이다.
그렇다면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에 대처하는 우리의 행동 비책은 무엇인가? 여기서도 다양성의 증진이 최고의 진화 전략일까? 언뜻 보면 그 반대인 것 같다. 타집단에 대한 경계는 미덕이 되었고, 타인의 고통은 못 본 척을 해도 되는 분위기다. 학교도, 상점도, 우리의 마음도 문을 닫고 있다. 이것은 분명 다양성을 줄이는 행동이다.
사실 병원체와 감염자에 대한 공포와 혐오는 우리의 본성이다. 썩고 냄새나는 이상한 뭔가를 좋아하던 조상들은 살아남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혐오와 회피 행동이 진화했다는 사실은 우리 몸의 면역 작용만으로는 불충분했음을 말해준다. 신체 면역과 같은 사후 관리 체계와 더불어 사전 관리 체계도 필요했던 것이다. 진화학자들은 이 체계를 ‘행동면역계’라고 부른다. 이것은 감염의심 상태와 행동을 감지한 후 자동적 회피 및 혐오 반응을 일으킨다. 따라서 팬데믹 상황에서 각 개인의 행동면역계는 자동적으로 다양성을 차단한다.
이런 자동적 행동면역계에는 잘못이 없다. 이성이라는 수동 모드를 켜고 ‘바이러스가 창궐하니 내게도 이런 부정적 감정이 이는구나’라고 성찰하면 된다. 문제는 공포와 혐오 감정이 빠르게 전염되는 ‘집단적 역동’ 메커니즘에 있다. 진화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전염병 위협 상황에서 사람들은 노인, 외국인, 신체장애인, 심지어 비만인 사람에 대해서까지 혐오감을 드러낸다. 조금 다르게 생기거나 다른 처지에 있거나 다른 집단에 속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병원체를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문제는 행동면역계의 이런 민감한 작동이 동조 메커니즘을 통해 집단적으로 전염되는 현상인데, 이는 국가주의로 비화되기도 한다. 경제대국이 마스크를 해적질하고 품격 높은 나라의 전문가들이 아프리카를 백신 실험장으로 쓰자고 맞장구를 친다. 평상시 같았으면 서로 조심하고 배려했을 텐데 팬데믹이 오니 행동면역계에 고삐가 풀린 것이다. 중국인을 비하하는 “짱깨”라는 표현이 온라인에 급증한 것도 같은 현상이다. 이것은 한 개인의 혐오가 아니라 혐오의 집단적 동조다. 이런 부정적 감정의 집단전염을 ‘이모데믹(emotion+epidemic)’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모데믹은 다양한 가치가 혼재하는 지구촌 사회에서는 재앙이다.
이모데믹을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양성 증진이 신체 면역의 최고 전략이듯이 이모데믹의 최고 면역법도 다양성 추구다. 이성을 활용해 ‘역지사지’를 하고 정서적으로 ‘감정이입’을 함으로써 혐오에서 공감으로 나아갈 수 있다. 확진자, 의료진, 독거노인, 방치된 아이들, 외국인, 의료체계가 열악한 환경의 사람들 입장에서 생각해보고 함께 느끼고 돕는 행동을 실천해보자는 것이다. 광주의 의료진이 대구를 지원하고 광주 시민들이 대구에 장어 도시락을 전달한 ‘달빛동맹’ 사례를 보라. 이들의 행동은 다른 집단(가치)을 포용하는 공감이었다. 이러한 다양성 전략은 궁극적으로는 인류애로 이어질 수 있다.
전 세계가 사회적 거리 두기 캠페인을 강조하고 있다. 모임을 자제하자는 취지에는 이견이 없지만, ‘사회적’이라는 단어 선정이 매우 아쉽다.
사실 ‘사회적 거리’는 원래 관심의 반경을 뜻하는 용어이고 대개 그렇게 받아들인다. 그래서 이모데믹을 극복하려면 오히려 사회적 거리를 좁혀야만 할 것 같다고 느낀다. 이럴 때일수록 서로 더 공감해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물리적 거리는 넓히면서 사회적(심리적) 거리는 좁히는 일은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이다. 우리는 문명을 이룩할 만큼의 공감력과 과학·의료 기술을 가진 유일한 종이지 않은가. 소셜미디어를 통해 물리적 거리 두기를 하면서도 고통을 함께할 수 있고, 방호복을 입고 환자를 가까이서 돌볼 수도 있다. 심지어 뉴스만으로도 독거노인의 외로움을 함께 느낄 수도 있다. 바이러스는 물론이고 침팬지도 흉내조차 못 내는 일이다.
<장대익 서울대학교 자유전공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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