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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가 야(野)에 있고 소인이 위(位)에 있으니 백성들이 군주를 버리고 하늘이 재앙을 내린다.” <서경(書經)>에 나오는 말이다. 재야(在野)라는 말이 일찍부터 ‘조정이 아닌 민간에 있음’이라는 뜻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정치뿐 아니라 어떤 분야에서든 ‘재야’의 존재는 소중하다. 현실 권력을 쥐고 있지 않으므로 이해관계를 벗어나 옳은 말을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재야사학자’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나서면 정치가요, 물러나면 학자였던 조선시대 사대부와는 달리 정치와 학문이 각기 전문 영역으로 분화된 오늘날, 학문 분야에서 ‘재야’와 ‘재위’의 구분 기준은 무엇일까. 대학이나 연구기관 등의 ‘자리’에 오르지 않은 이들을 ‘재야’라고 불러야 할까? 그러나 그런 연구자들도 정작 ‘재야사학자’라고 불리는 어떤 이들의 국수주의적인 주장에 대해서는 대개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여긴다. ‘재야’인지 아닌지를 떠나서, 애초에 ‘역사학’으로 부르기에 결격되는 점이 많기 때문이다.
제도권 교육을 제대로 거치지 않았으므로 학문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발굴 유물이나 현전 사료를 대하기에 앞서 어떤 바람과 의도가 강하게 개입된다면 그것은 학문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찬란했어야만 하는’ 우리의 역사를 판타지로 그려내고 거기에서 위로를 받는 것은, 취향의 문제다. 그러나 ‘역사학’이라는 이름으로 그것을 재구성하여 사실로 믿게 만들고 그러기 위해 기존 학계를 싸잡아 음해한다면, 게다가 거기에 정치적인 힘까지 실리게 된다면, 그 폐해는 걷잡을 수 없을 것이다.
공자는 세련된 표현은 잘 못하지만 속이 꽉 찬 사람을 가리켜서 야(野)하다고 했다. 거칠고 촌스럽지만 사심이 없다는 뜻이다. ‘재야’를 표방하던 이라 하더라도, 어느 순간 현실 권력이나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게 되면 사이비가 되기 십상이다. 그러면서 마치 자신이 제도권의 지독한 폐쇄성과 세뇌된 식민사관의 피해자라도 되는 듯이 행세하며 대중을 현혹시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기존의 학계에 이런저런 문제들이 적지 않고, 지식 대중화를 위한 노력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기에 더욱, 사심과 신념 때문에 토론이 불가능한 유사사학자가 아니라, 학문의 기반을 우직하게 성찰하는 진정한 재야사학자가 필요하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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