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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전, 모 박물관에서 매입 대상 유물들을 감정하면서 오래된 노트 한 권을 봤다. 1930년께 어떤 프랑스인이 파리에서 출발, 베를린, 모스크바, 이르쿠츠크, 하얼빈 등지를 거쳐 서울까지 오면서 여정과 각 역 주변에서 받은 인상을 기록한 노트였다. 페이지마다 기차 탑승권, 수하물 표, 호텔 영수증, 식당 영수증, 공연장 입장권 등이 첨부돼 있었다. 노트를 한 장 한 장 넘기는 동안 가슴 한구석을 짓누르고 있던 무언가가 서서히 부서지는 느낌을 받았다. 동시에 심한 자괴감을 느꼈다. 노트의 주인은 80여 년 전 사람이었지만, 오늘날의 한국인들보다 더 현대인이었다. 그는 대륙이 얼마나 큰지, 문화와 문화가 어떻게 연속되며 어떤 지점에서 단절되는지, 자연환경과 주민의 기질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자기 두 눈으로 직접 본 사람이었다. 그에게 광활한 대지는 상상의 공간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실체였고, 국경선은 사람을 가둬 두는 감옥 담장 같은 선이 아니었다. 그가 기차 안에서, 또는 역 주변에서 만난 독일인, 소련인, 중국인, 일본인, 조선인들은 인간의 다양성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보편 인류’에 대한 성찰도 촉발했다. 그에게 세계는 ‘열린 공간’이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1899년 9월18일, 한강 남안 노량진에서 인천에 이르는 경인철도가 개통되어 우리나라 철도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조선 정부는 처음 궤간(軌間)을 표준궤(1435㎜)로 정했으나, 러시아의 압력에 밀려 광궤(1524㎜)로 변경했다가 철도 부설 주관사인 경인철도합자회사의 요구를 받아들여 다시 표준궤로 환원했다. 철도는 이 땅에 모습을 드러내기 전부터 대륙과 연결되어 있었다. 1901년 6월25일, 일본 도쿄에서 경부철도주식회사가 창립되었다. 창립 직후 경부철도의 궤간 문제를 둘러싸고 논란이 일었다. 조선처럼 낙후한 지역에는 작고 가벼운 차량이면 족하기 때문에 건설비를 줄일 수 있는 협궤가 적당하다는 주장과 일본이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표준궤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립했다. 논쟁 끝에 한국 철도는 대륙 철도의 일부여야 한다는 주장이 승리했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은 경부철도주식회사의 부설권과 대한제국 서북철도국이 소유했던 경의철도 부설권을 빼앗아 임시군용철도감부에 넘겼다. 임시군용철도감부는 강제동원한 한국인들을 총칼로 위협하여 기록적인 속성공사로 한반도 종관철도를 완성했다. 그러고선 러일전쟁 승리의 전리품으로 획득한 중국 동북지역 철도망을 한반도 종관철도에 연결시켰다.

중국 동북지역 철도와 연결된 한국 철도는 일본의 대륙침략을 위한 수단이기는 했으나, 그로 인해 한국인들의 심상 지리 공간은 비약적으로 넓어졌다.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철도선은 국경선보다 더 선명한 선이었고, 철도선상의 도시들은 지도상의 위치보다 훨씬 가까운 곳에 있었다. 경성역 매표소에서는 중국의 다롄(大連), 창춘(長春), 선양(瀋陽) 등지로 가는 표를 살 수 있었고, 기차를 한 번만 갈아타면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할 수 있었다. 3000리 강토는 일본에 빼앗겼으나, 한국인들이 의식하는 세계는 10만8000리로 확대되었다.

1945년 8월27일, 북위 38도선을 지나는 도로와 철도 주변에 ‘38선’을 알리는 팻말이 섰다. 남과 북을 잇던 철도는 그대로였으나, 기차 운행은 끊겼다. 6·25전쟁 중에는 한반도의 거의 모든 철도가 이동하는 전선(戰線)을 따라서 끊어졌다 이어졌다를 반복했다. 1953년 7월27일 오전 10시를 기해 그 시점의 전선이 휴전선으로 정해졌다. 그 직후부터 남과 북 모두 휴전선을 따라 긴 철책을 세웠다. 비무장지대로 지정된 휴전선 남북 2㎞ 구간에는 수많은 지뢰가 매설되었다. 휴전선은 보통사람이 가까이 가서는 안 되는 선이 되었다.

철조망은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놓였다. 해마다 6월이면, 학생들은 반공 포스터를 그렸다. 극소수의 예외가 있기는 했으나 학생들의 그림은 거의 같았다. 먼저 한반도 모양을 그리고 가운데에 선을 그었다. 아래쪽은 파랑, 위쪽은 빨강으로 칠한 뒤 다시 위쪽에 뿔 달린 머리, 날카로운 송곳니, 빨간 눈을 가진 도깨비나 귀신, 또는 괴물을 그렸다. 아래쪽에는 논밭과 공장, 집들과 사람들을 그린 뒤 마지막으로 ‘상기하자 6·25’나 ‘북괴는 노린다. 우리의 빈틈을’ 같은 글귀를 그려 넣었다. 옛날 사람들은 땅끝에 지옥문이 있다고 믿었으나 현대 한국인들에게는 휴전선이 지옥문이었다.

한국인들에게는 한반도의 휴전선 북쪽뿐 아니라, 북·중 국경 너머의 대륙도 오랫동안 닫힌 공간이었다. 북한 중공 소련은 한 덩어리로 뭉친 거대한 공산제국이자 악마의 대륙이었다. 그 압도적인 크기가 주는 공포 앞에서, 한국인들은 대륙으로 향하는 마음의 길조차 끊었다. 일제강점기 선조들이 기억했던 수많은 역 이름과 땅 이름들이 휴전 이후에는 한국인들의 뇌리에서 사라져 갔다. 오늘날의 한국인들은 유럽 대륙 지도 위에 각 나라와 도시 이름을 써넣을 수 있지만, 유라시아 대륙 횡단 철도 주변에 어떤 나라와 도시들이 있는지는 거의 알지 못한다. 1990년대부터 중국과 러시아로 가는 하늘길이 열리기는 했으나, 지상의 풍경이 소거된 비행기 여행은 광활한 공간에 대한 감각을 키워주지 못한다.

6·25전쟁 당사국들이 전쟁 종료를 선언해도, 남북 또는 북·미 간에 휴전협정을 대신하여 평화협정이 체결돼도, 휴전선은 이름만 바뀔 뿐 바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휴전선 너머에 대한 공포는 확실히 줄어들 것이며, 한국인들의 마음속에 그어졌던 경계선은 서서히 옅어질 것이다. 남북 간 합의대로 철도선이 다시 이어진다면, 휴전선을 지옥문으로 여기며 1500리 강토에 갇혀 산 탓에 어쩔 수 없이 좁아졌던 한국인들의 마음도 다시 넓어질 것이다. ‘마음 넓히기’는, 통일로 가는 첫걸음이다.

<전우용 |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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