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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직설]단단해진다는 것

opinionX 2018. 5. 8. 14:23

나는 무른 사람이다. 무르다는 것은 여리다는 것이다. 마음이 여리고 힘이 약하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한 사소한 말에 쓸데없이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온종일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 말에서 칼날을 발견하기라도 하면 어김없이 가슴을 움켜쥔다. 생각은 계속해서 알을 낳는다. 그 알을 다 부화시킬 때쯤이면 이미 심신은 녹초가 되어 있다. 도무지 초연해지지 않는다.

어릴 때에는 이 법석임이 좋았다. 남들과 무리 없이 지내는 것도 무른 나의 성질 덕분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무름이 꾸준해지면 무르익거나 무르녹는 경지에 다다를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무르다는 것이 유연하다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체득하기 시작했을 때, 나의 무름은 더 이상 나의 편이 되지 못했다. 유연하게 휘어지는 것과 물러서 주저앉는 것은 차원이 다른 얘기다.

그때부터 나는 무르지 않기 위해서, 아니 정확히 말하면 물러 보이지 않기 위해 애쓰면서 지냈다. 호탕하게 웃고 호기롭게 말했다. 그것이 내가 단단해지는 일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나는 나를 가장(假裝)하고 있었다. 내가 무르다는 사실을 알아챈 누군가가 꼬챙이 같은 말을 깊숙이 찔러 넣기 전에, 나는 선수를 쳤다. 선수를 쳤다는 사실 때문에 그날 밤은 유독 길었다. 물러터진 가슴을 움켜쥐고 밤새 앓았다.

4월은 끔찍한 달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프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아버지는 항암 치료를 받다 뇌경색으로 입원하셨다. 응급실 옆 대기실에서 쪽잠을 자는 자세로 밤을 거의 꼬박 새울 때, 병원에 있는 비상구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한밤중인데도 비상구 표지판은 굳건하게 초록빛을 내고 있었다. 제아무리 깜깜해져도 어딘가에는 반드시 빛이 남아 있을 거라는 믿음처럼 보였다.

같은 달, 사랑하는 사람들의 암 투병 소식을 들을 때마다 두 다리가 휘청거렸다. 암이라는 단어는 내게 너무 멀리 있는 것이었다. 어느 날 친구가 병원에 있다며 전화를 해왔을 때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감기 때문이라는 말을 듣고 한숨을 내쉬었지만, 한번 동요된 마음은 쉬 잠잠해지지 않았다. 병에 크고 작음이 있다고 하나,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프다고 하면 절로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여전히 나는 무른 사람이었다.

그날부터 나는 걷기 시작했다. 산책하는 자세는 아니었다. 걱정하는 마음을 덜기 위해 필사적으로 걸었다. 잠실에서 강남으로, 합정에서 신촌으로, 여의도에서 홍대로 걸었다. 긴 다리를 건넌 뒤에야 그것이 서강대교임을 깨달은 날도 있었다. 무른 나를 인정하는 것이 단단해지는 첫걸음임을 온몸으로 알게 되었다. 첫걸음을 떼고 나자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나는 이제야 겨우 단단해질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단단하다는 것은 외부에서 어떤 힘을 받아도 쉽게 변하거나 부서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평소와 똑같이 일하고 밥을 챙겨 먹고 주위를 돌볼 수 있다는 것이다. 나부끼는 데 익숙하고 휩쓸리는 게 자연스러운 내게 단단해지는 일은 쉽지 않았다. 다리를 건너고 동을 지나쳐 구가 바뀌는 것을 지켜보면서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올렸다. 여기를 지나고 나면, 여기만 건너고 나면 햇볕이 내리쬘 것 같았다. 그 햇볕을 받고 나란히 힘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함께 단단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독일에 있는 허수경 시인이 암과 싸우고 있다. 그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화불단행(禍不單行)이라는 사자성어를 떠올렸다. 좋지 않은 일이 겹쳐 왔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타국에서 아픔과 외로움을 홀로 견디고 있을 누나를 떠올리니 가슴이 몹시 쓰라렸다. 정작 누나는 김민정 시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민정아, 기회가 되면 여기저기 알려줘. 이유는 하나야. 내가 너무 많은 사랑을 받았어.”

나는 화불단행이라는 사자성어를 지우고 거기에 우공이산(愚公移山)을 집어넣었다. 한 발 한 발 걸어 나가다 보면 이 길 끝에 빛이 있을 것이다. 햇볕이 있을 것이다. 수경 누나의 소설 <박하>를 다시 읽는다. “살아가는 거야, 서로 사랑하는 우리,/ 상처에 짓이겨진 박하 향기가 날 때까지.” 그리고 박하 향기가 날 때쯤 나는, 우리는 단단해져 있을 것이다.

<오은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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