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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2003)은 화성 연쇄살인사건에 기반한 영화다. 감에 의존해 수사하는 지역토박이 형사 박두만(송강호)과 과학수사를 신봉하는 서울 파견 형사 서태윤(김상경)이 공조해 연쇄살인범을 찾아가는 내용이다. 실제 사건이 그러했듯이 두 형사는 영화 막판에 가서도 범인을 잡는 데 실패했다. 경찰들이 용의자를 좁혀가는 과정에서 무고한 시민들만 쫓기고 얻어맞고 심지어 죽음에 이르렀을 뿐이다.

십수년이 흘러 형사를 그만둔 박두만은 우연히 최초 희생자가 발견된 장소를 지나다 옛 수사 과정을 떠올린다. 박두만이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영화는 끝난다. 박두만의 시선은 픽션의 한계를 넘어 객석에 있을지 모르는 범인을 노려보는 듯하다. 봉준호는 화성 연쇄살인사건 용의자 이춘재가 특정됐다는 소식에 “드디어 범인의 얼굴을 봤다. 범인을 잡기 위해 끝없는 노력을 기울인 경찰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고 말했다.

형사 박두만(송강호·왼쪽)과 서태윤(김상경)은 한팀이 되어 용의자의 뒤를 쫓는다. _ 싸이더스 제공

봉준호는 <살인의 추억> 이후 6년 뒤 <마더>를 선보였다. <마더>는 <살인의 추억>만큼 흥행이 되거나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살인의 추억> 못지않은 수작이다. 어수룩한 아들 도준(원빈)이 한 소녀의 살인범으로 몰리자 홀어머니 혜자(김혜자)가 진범을 찾아 아들의 누명을 벗기려는 내용이다. 

개봉 당시엔 몰랐지만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용의자가 드러난 뒤 알 수 있는 사실은 <살인의 추억>과 <마더>가 한 쌍으로 묶인 영화라는 점이다. <살인의 추억>이 정의를 구현하려는 형사들의 집념을 다뤘다면, <마더>는 부조리한 사법절차의 이면을 들여다보게 한다.

경찰은 화성 연쇄살인 8차 사건의 수법이 여느 것들과 다르다는 점을 들어 모방범죄라고 결론내렸다. 경찰은 피해자 부근에서 용의자의 체모를 발견했고, 이를 근거로 농기계 수리공 윤모씨를 체포했다. 윤씨는 대법원에서 유죄를 확정받고 20년을 복역한 뒤 2010년 가석방됐다.

이춘재가 8차 사건 역시 자신의 범행이라고 자백하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물론 이춘재가 자신의 행적을 과장해 말했을 수 있다. 법적으로는 여전히 윤씨가 범인이다. 

하지만 시민과 언론과 국가가 최악의 연쇄살인범을 찾아내라고 닦달하는 와중에 경찰 수사에 여러 무리수가 있었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경찰의 강압적인 수사에 범행을 자백했다가 현장검증에서 자백을 번복한 이도 있고, 재미교포 심령술사가 범인으로 지목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불려가 고초를 겪은 이도 있다. 경찰 수사의 피해자 중 몇 명은 훗날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내 승소하기도 했지만, 일상이 파괴되거나 결국 죽음에 이른 이도 있다.

윤씨 역시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줄곧 억울함을 호소했다. 고아였던 윤씨는 초등학교를 3년만 다닐 정도로 어려운 삶을 산 것으로 알려졌다. 사건 당시 경찰에 잡혀간 윤씨는 3일간 잠을 자지 못한 채 취조를 받았고, 소아마비를 앓아 불편한 한쪽 다리로 쪼그려뛰기를 하는 고문을 당했다고 말한다. 법정에서도 윤씨는 자신의 입장을 대변할 수 없었다. 돈이 없어 변호사를 따로 선임하지 못했다. 국선변호인은 결심공판 때 처음 나타나 “선처해 주십시오” 한마디만 했다고 한다.

윤씨가 진범이든 아니든, 제대로 된 수사와 재판을 받지 못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가장 끔찍한 범죄자조차 가장 정당한 사법절차를 거쳐야 한다. 시민의 법감정에 어긋날지라도, 그런 과정을 보장하는 것이 국가다.

<마더>에서 혜자는 천신만고 끝에 아들을 무시무시한 사법절차의 굴레에서 빼낸다. 혜자는 아들 대신 범인으로 지목돼 수감 중인 종팔을 면회간다. 외모로 짐작해보건대 종팔은 다운증후군을 가진 듯하다. 혜자의 아들 도준이 안락한 삶을 누렸다고 하기는 어렵겠지만, 종팔은 도준보다 더 낮은 곳에 위치한 이였다. 혜자는 종팔에게 “엄마 없어?”라고 묻고는 흐느낀다. 종팔에겐 변호사도, 친구도, 엄마도 없었던 것 같다. 그저 자신의 작은 몸과 마음으로 경찰들의 수사를 홀로 묵묵히 겪을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살인의 추억> 속 박두만의 모델이 된 하승균 전 임실경찰서장은 “형사는 알파가 있어야 수사를 한다. 알파란 범인에 대한 적개심 같은 거다”라고 했다. 불의를 목격했을 때 피가 거꾸로 솟구침을 느끼고, 그 느낌을 오래도록 간직해 범인을 찾는 동력으로 이어가는 경찰과 검찰이 있기에 사회정의는 잠정적으로나마 유지된다. 하지만 정의는 합리적이고 정당한 제도 위에서 실현돼야 한다. 무엇보다 돈 없고 인맥 없고 권력 없는 이들일수록 제도의 도움을 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영화 주인공들은 종종 느리고 거추장스러운 사법절차의 굴레를 뛰어넘어 사적 복수를 행해 관객에게 쾌감을 준다. 현실에선 그 느리고 거추장스러운 과정이 시민의 인권을 보호하고 사회를 살 만한 곳으로 만든다.

<백승찬 사회부 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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