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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왕국2>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5년 전 개봉한 <겨울왕국>과 지난달 개봉한 <겨울왕국2>는 모두 1000만 관객을 돌파한 흥행작이다. 엘사와 안나의 자매애를 부각하고, 눈사람 올라프가 코미디를 담당하고, ‘렛 잇 고’나 ‘인투 디 언노운’처럼 많은 이들이 자동적으로 흥얼거릴 만한 주제곡이 있다.

영화 ‘겨울왕국2’ 한 장면.

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이 있다. ‘악당의 유무’다. 전편에는 권력에 눈이 멀어 사랑을 위장한 왕자가 악당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속편에는 이렇다 할 악당이 없다. 거대하고 힘센 바위거인은 딱히 악의를 가진 듯 보이진 않는다. 엘사의 할아버지인 아렌델의 루나드 왕이 자연 친화적인 노덜드라족을 절멸시키려는 음모를 꾸민 악당이라 할 수 있지만, 그는 이미 오래전에 죽어 회상 속에만 등장한다.

<겨울왕국2>에서 굳이 악당을 꼽자면, 루나드 왕이 남긴 제국주의의 유산이다. 루나드 왕은 노덜드라족에게 친선을 목적으로 하는 댐을 지어줬다. 이 댐은 자연환경을 변화시켜 노덜드라족과 자연·정령의 교감을 끊는 동시, 아렌델 왕국의 안위를 지키려는 숨은 용도를 갖고 있었다. 결국 엘사가 무찔러야 하는 것은 교활한 문명이 평화로운 부족 공동체에 제공한 댐이다. 이 댐은 선물을 가장한 덫이다.

<겨울왕국>을 제작한 디즈니는 세계적인 콘텐츠 기업이다. 보수적인 가족주의를 설파하던 디즈니가 최근 ‘정치적 올바름’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다. 20세기 대중문화의 아이콘이자 고전적인 영웅 서사를 선보인 <스타워즈> 시리즈는 21세기 디즈니에 의해 제작되면서 여성 주인공을 전면에 내세웠다. 애니메이션 <주토피아>는 이민자에 대한 혐오, 여성에 대한 편견을 짚었다. 디즈니가 인수한 마블 스튜디오는 흑인 영웅(블랙 팬서), 여성 영웅(캡틴 마블)을 선보였다. 디즈니가 이런 영화들을 내놓을 수 있는 배경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욕구가 보편적이어서 많은 관객을 모을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 있을 것이다.

예전 같으면 꽤 급진적으로 보였을 환경주의·반식민주의 메시지를 내장한 <겨울왕국2>가 전 세계 스크린에 깔릴 수 있었던 이유도 같은 맥락에 있다. 기후위기는 현실이고, 환경주의는 보편의 가치라는 믿음이 디즈니 경영진들의 전략 구도에 놓였다.

타임지는 올해의 인물로 스웨덴의 청소년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를 선정했다. 툰베리가 학교에 가지 않고 스웨덴 의회 앞에서 기후위기를 경고하는 1인 시위를 시작한 것은 지난해 8월이었다. 아무도 툰베리에게 시위를 권하지 않았고, 무엇도 툰베리의 앞날을 보장하지 않았다. 툰베리는 그저 자신을 포함한 미래 세대에게 가장 절박한 문제를 위해 대책 없는 행동을 시작했을 뿐이다.

소녀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한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의 표지. AP연합뉴스

1년 남짓한 기간에 툰베리는 환경운동과 청소년운동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유엔본부에서 열린 기후행동 정상회의의 지도자들 앞에서 “당신들의 빈말이 내 꿈을 앗아갔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라고 일갈했다. 교황, 버락 오바마 등 전 세계 유명 인사들을 만났다. 툰베리의 행동을 따라 한 청소년들의 결석 시위가 전 세계에서 열렸다.

<시녀 이야기>의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는 툰베리를 잔다르크에 비유했다. 잔다르크는 대의를 위해 개인의 이득과 세속의 즐거움, 인간적 욕구를 희생한다. 속세에서 나고 자란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성의 경지를 엿본다.     

대부분의 세속적 인간은 잔다르크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하지 못하는 대상을 배척하는 것 역시 인간 세상에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앞뒤 재지 않고 지구의 존속을 외치는 툰베리의 헌신도 속세에선 종종 조롱의 대상이 된다. 16세 툰베리에게 악플을 단 유명인사로는 73세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가 있다. 최근 트럼프는 자신의 트위터에 “그레타는 자신의 분노조절 문제에 애써야 한다. 진정해라 그레타, 진정해!”라고 썼다.

툰베리는 기후위기에 대한 교육을 받은 11세 때 깊은 우울에 빠졌다고 한다. 말을 거의 하지 않았고 먹지도 않으려 해 입원할 지경이었다. 온 가족이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인정해 채식을 시작하고 비행기를 타지 않기로 결심한 뒤에야 툰베리는 조금씩 활력을 되찾았다.

유명해진 툰베리는 행복할까. 분노와 걱정에 불타오르는 툰베리의 눈빛을 보면 별로 그런 것 같지 않다. 엘사는 행복할까. 엘사는 아렌델 왕국의 왕관, 사랑하는 사람과 이루는 화목한 가정을 포기한다. 대신 문명과 자연을 잇는 다섯 번째 정령으로서의 운명을 받아들인 뒤 숲으로 향한다. 동생 안나에게 왕관을 물려준 결말부 엘사의 얼굴은 미소를 띠고 있지만, 엘사에겐 외로운 헌신의 길만이 남아있다.

모두가 툰베리나 엘사처럼 살 수는 없다. 그렇다고 툰베리와 엘사에게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게 한 뒤, 나몰라라 흥청망청 즐길 수도 없다.

<백승찬 사회부 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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